[커버스토리] 달빛 은은한 구중궁궐 … 꽃들과 함께 노니노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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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인터넷 입장권 판매는 개시 2분 만에 매진됐다. 세계적인 팝스타 내한공연 얘기가 아니다. 딱딱한 문화재를 세련된 이벤트로 승화시킨 창덕궁 달빛기행 얘기다.

창덕궁 달빛기행은 문화유산을 활용한 관광 마케팅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지난해까지 1만610명이 참가했고, 인터넷에서 입장권을 판매할 때마다 입장권을 구하지 못 한 사람들의 항의 소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올해로 5년째를 맞이한 창덕궁 달빛기행의 인기 비결은 간단하다. 임금이 된 듯한 경험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야심한 시각 구중심처(九重深處)를 거니는 건 보통 행운이 아니다. 달빛 창창한 음력 보름 즈음에 맞춰 100명이 궁궐과 숲길을 거닐고, 연못가 정자에 앉아 음악을 즐긴다. 지금 우리 시대에 이만 한 문화적 호사가 또 있을까. 창덕궁 류근식 관리소장은 “깊은 밤 쉽게 올 수 없는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가자는 뿌듯해한다“며 “한복을 입고 와 몰입하는 외국인도 있다”고 말했다.

창덕궁은 1405년 조선 태종 연간에 지어졌다. 법궁(法宮) 경복궁의 별궁(別宮)으로 만들었으나 그 지위가 경복궁에 뒤지지 않는다. 500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많은 임금이 가장 오랜 기간 거처한 궁궐은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이었다. 유네스코도 1997년 창덕궁을 한국의 궁궐 중 유일하게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했다.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렸고 풍수에 기반한 조선시대 특유의 건축물 배치가 독특하다’는 게 그 이유다.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올해 창덕궁 달빛기행은 참가 기회를 대폭 늘렸다. 하루 입장객이 100명인데 4, 9, 10월에는 2부제로 운영해 하루에 180명까지 받는다. 외국인 행사까지 더하면 올 1년 동안 모두 37회에 걸쳐 3520명이 달밤의 창덕궁을 즐길 수 있다.

올봄 달빛기행 입장권은 이미 매진됐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가을에도 기회는 있다. 그때까지 기다리기 어려우면 당장 가벼운 옷차림으로 봄 햇살 아래의 궁궐을 걸어보자. 요즘 같은 날에는 봄 향기 그득한 창덕궁 뒤뜰, 후원만 걸어도 좋다. 올해로 일반인에 개방된 지 10년째를 맞은 후원은 임금이 풍류를 즐겼던 비밀스러운 궁궐 뒤뜰이다.

달빛기행을 앞두고 조명 테스트가 한창인 창덕궁을 week&이 들어갔다 왔다. 낮에는 후원을 걷고, 이달 1일 처음 개방된 낙선재 뒤뜰에도 가봤다. 창덕궁에서 만난 이탈리아인 스테파노(50)의 소감이 창덕궁의 가치를 압축해 보여주는 듯했다. “끔찍하게 복잡한 서울 한복판에 창덕궁이 있어 참 다행입니다.”

최승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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