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6~7단계 거래 구조 1년 전 그대로 … 봄배추값 폭락해도 정부 속수무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전북 고창군 공음면의 배추 재배 농민들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밭을 바라보고 있다. 농민 이양재(왼쪽)씨는 “이 배추들이 수확될 때쯤 안 팔린 월동배추와 봄배추가 쏟아져 시세가 더 떨어질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사진 이마트]

지난달 21일 오후 1시 전북 고창의 배추밭에서 만난 농민 안영선(52)씨는 한창 자라는 배추 모종을 보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5월 20일 출하 예정인데, 앞으로 가격이 더 떨어진다니 꼼짝없이 갈아엎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의 핵심 과제 중 하나인 ‘농산물 유통개혁’이 헛바퀴 돌듯 전진을 못하고 있다. 지난해 5월 정부는 6~7단계인 농산물 유통단계를 선진국 수준(3~4단계)으로 확 줄이고 수급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요지의 농산물 유통구조 개혁 대책을 내놨다.

작년 5월 3~4단계로 축소 약속

 하지만 본지 취재팀이 1년 만에 배추가 산지에서 수확돼 소비자에게 가기까지, 이른바 ‘배추 로드’를 다시 점검해본 결과 복잡한 유통구조는 요지부동이고 번번이 빗나가는 수급 관리도 고쳐지지 않았다.

<중앙일보 2013년 3월 15일자 1면, B2~3면>

1년 전 농민들은 수급 관리를 제대로 해 폭·등락을 막겠다는 정부의 말에 기대를 걸었지만 돌아온 건 원가도 못 건지는 가격 폭락이다. 같은 날 하우스 배추 수확에 한창이던 정재욱(52)씨는 잘 자란 배추를 보고도 씁쓸해했다. 산지수집상인 정씨는 “포기당 1000원이 원가인데 지금은 도매가로 800~900원에 넘기고 있다”고 말했다.

 수확 도중 날아온 한국농촌경제원의 ‘봄배추 속보’ 문자를 보더니 더 화를 냈다. ‘월동배추 저장량 많아 봄배추 약세 지속 전망’이란 내용이다. 그는 “지역별로 파종량을 조절해주지 않고, 다 키운 뒤 시세만 알려주니 무슨 도움이 되나”라고 말했다. 전남 해남에선 이미 112㏊(약 34만 평)의 배추밭을 갈아엎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파종량 등 수급관리는 주먹구구

 이렇게 농가에서 산지수집상을 거친 배추는 다시 2~3단계의 수집상 을 거쳐 21일 밤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에 도착했다. 기다리던 중도매인들은 오후 10시부터 트럭 20여 대를 오가며 구석구석 배추 품질을 확인했다. 오후 11시 경매가 시작되자 30분 만에 망(3포기)당 2400~2700원에 낙찰됐다.

 정부가 확대하겠다던 정가·수의매매는 이날 가락시장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중도매인 김모씨는 “가락시장이 생기면서부터 지금까지 경매를 해왔는데 바뀌겠나, 정부가 뭐 바꾼다고 하는 건 늘 말뿐”이라고 했다.

 산지에서부터 싣고 내리는 과정을 규격화해 하역 비용을 줄이자는 ‘팰릿(나무 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대형 포장용기)’ 역시 찾아볼 수 없었다. 한 중도매인은 “망으로 할 때보다 팰릿 포장 비용이 더 비싸다”며 “요즘 같은 시세에 농민들이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20여 대의 차량 경매가 끝나자 곧바로 2차 도매시장이 열렸다. 김치공장, 동네 채소가게, 전통시장, 수퍼마켓 등에 납품할 도매상들이 중도매인들로부터 배추를 사들이는 자리다. 역시 지난해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특등품을 망당 2700원에 낙찰받은 중도매인 김돈예(64)씨는 리어카에 배추를 싣고 판매하는 상인에게 40망을 팔아 망당 600원을 남겼다.

 망 단위로 차에서 운반해 리어카나 작은 트럭에 실어주는 일을 하던 하역 근로자들을 만났다. 업무시작 전 잠깐 커피를 마시던 이들은 “물류비용을 줄이면 먹고살 길이 끊기는 거 아니냐”고 불만을 표시했다.

 지난해와 달라진 것이라곤 산지에서 팔리는 가격이 지난해에는 포기당 800원이었데 올해는 농민이 원가도 못 건지는 수준인 500원인 점, 식탁에 오르는 가격이 지난해엔 5000~5300원이었는데 올해는 2000~2300원으로 떨어졌다는 점뿐이다. 풍작으로 인한 공급과잉이 빚은 결과다.

지금은 폭락, 가을엔 폭등할 수도

 농민 겸 산지수집상 김희환(52)씨는 “지금 여기저기서 폐기되고, 모종도 심지 않아 막상 여름·가을이 되면 물량 부족 탓에 가격 폭등이 다시 올 수 있다”고 혀를 찼다.

 오세조(한국유통물류정책학회 회장)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작황 때문에 농산물의 소비자 가격이 낮다 보니 유통구조 개선 과제가 정부 정책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며 “생각나면 한 번씩 점검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농림축산식품부 유통정책과 변상문 서기관은 “30년 동안 경매만 하다 보니 생산자와 유통자 모두 정가·수의매매의 필요성을 크게 못 느낀다”며 “더 많이 참여할 수 있게 인센티브 등을 고민하겠다”고 밝혔다.

특별취재팀=최지영·문병주·구희령·채윤경 기자

◆정가매매=제품 출하자가 미리 판매 예정가격을 정한 물품에 대해 구매를 하려는 쪽에서 물량만 제시해 거래가 이뤄지는 경우. 예를 들어 농민이 배추 한 망당 4000원에 팔겠다고 정해놓고 물량만 협상해 거래하는 방법.

◆수의매매=출하자가 판매할 물품의 가격이나 수량을 구매자와 일대일로 협의해 거래하는 것. 경매는 당일 반입량에 따라 가격이 급등락하는 데 반해 정가·수의매매는 당일 출하 훨씬 전 가격을 결정하기 때문에 가격 급등락을 막을 수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