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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김영희 칼럼

북핵과 안보 분리로 가는 한·일 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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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백 마디 말보다 표정 하나, 때로는 무표정 하나가 더 웅변적인 메시지일 때가 있다. 헤이그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대통령님, 안녕하시무니까”라는 한국말 인사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굳은 표정이 전형적인 사례다. 아베 총리는 일본인에게 쉽지 않았을 그 말을 외우느라 제법 애를 썼겠지만 그 인사를 받은 박 대통령은 딱딱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주선으로 한·일 정상이 한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한·일 관계의 앞날이 어둡기만 하다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외교 무대에서 그건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세계여론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가려질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일본의 극우세력들의 반발이 다시 기승을 부려 한·일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이다. 우익의 선봉인 산케이신문이 편집위원 칼럼으로 포문을 열었다. 산케이 칼럼은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에 나온 말에 기대어 박 대통령의 태도를 “정치적인 죄”라고 공격했다. 칼럼은 또 교묘한 간접화법으로 박 대통령을 사태의 경중과 우선순위를 모르는 바보라고 비난했다.

 쓰쿠바대학의 후루타 히로시라는 국제정치학 교수는 박 대통령의 태도를 “민족적 유치함”이라고 비판했다. 중앙일보 도쿄지사에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는 보통 일본인들의 전화도 왔다. 일본 사회의 이런 분위기가 확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정부는 망언을 일삼는 일본 총리에게 시원한 펀치를 날렸다는 만족감에 안주하지 말고 일본에 대한 ‘전략 B’를 가동해야 할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3월 26일자 보도에 따르면 백악관은 지난 석 달 동안 한국과 일본에 집중적인 설득을 폈다. 만남은 오바마 대통령의 초청 형식으로 미국 대사관저에서 갖는다, 역사인식과 위안부 같은 한·일 간의 난제는 의제에서 빼고 세 나라 공통의 초미의 관심사인 북한핵만 논의한다는 조건으로 한국과 일본을 설득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3월 6일 아베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세 사람이 함께 만나자고 제안했고, 같은 날 캐럴라인 케네디 주일대사는 아베 총리와 오찬을 하면서 3자회동에 대한 아베 총리의 동의를 받아냈다. 한·미·일 정상들이 만나는 그 순간 북한은 축포라도 터뜨려주듯 동해안으로 2발의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박·아베회담을 성사시킨 오바마 대통령에게 갈채를 보낸 셈이다.

 역사와 위안부 문제가 빠진 한·일 정상의 만남은 반쪽짜리 회담이다. 한국과 일본의 이해가 일치하는 북핵을 의제로 만난 한·미·일 정상회담의 최대 수혜자는 오바마 대통령이다.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에서 세계적인 리더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그는 동북아 협력에 최대 걸림돌인 한·일 갈등을 성공적으로 중재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동유럽에서의 실점을 다소나마 만회할 계기를 잡은 셈이다. 그러나 북핵문제에서 실질적인 성과는 미미하다. 겨우 6자회담의 한·미·일 수석대표 회동과 차관보급 3각안보대화에 합의하는 데 그쳤다. 세 정상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강조하여 핵협상의 시계를 오히려 거꾸로 돌려놓았다.

 그 자리에서 미국 대통령과 일본 총리가 한·미·일 안보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미사일 방어망에 한국의 참가를 요구한 것은 한·미·중 3각관계에서 파장이 예상되는 의미심장한 사태다. 중국은 한·미·일 안보협력체제를 중국 포위망으로 경계한다. 중국이 일본과의 대결 태세를 꾸준히 강화하는 것도 서태평양에서의 미·중 헤게모니 싸움의 한 갈래다. 중국이 최근 일본의 만행에 관한 자료들을 계속 공개하고, 안중근 기념관을 세워주고, 안중근 영화 촬영을 결정하는 등 한국에 최대의 호의를 베푸는 것도 태평양 전략이다. 한·미·일 정상회담은 문제해결보다 우리에게 미·중·일 외교의 무거운 과제만 떠안겼다. 한·일 정상이 만나 한·일 관계 회복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낙관적 기대에나 만족해야겠다.

 박 대통령이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일본 총리를 만난 것은 앞으로의 안보와 북한핵의 분리가 한·일 관계의 기본 틀이 된다는 신호다. 북한의 막무가내 도발로 상징되는 동북아의 엄숙한 지정학적 요구를 고려하면 한·일 관계에서 북핵과 안보의 분리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렇게 안보 쪽의 기능적 관계라도 정상화해 북한문제에 공동대처하면서 한·일 간의 현안들은 민·관·정 다채널과 세계여론을 동원하는 다원외교와 조심스러운 한·중 공조로 입체적인 접근을 하는 수밖에 없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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