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수 잡았던 27년 베테랑 "종북세력에 국정원 무력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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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조사를 받은 국정원 권모 과장이 지난 22일 자살을 기도했다. 24일 오후 권 과장이 입원한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 응급중환자실이 통제돼 있다. [강정현 기자]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에 연루된 국가정보원 권모(51·4급·선양총영사관 부총영사) 과장이 지난 22일 자살을 기도하면서 “국정원을 흔드는 상황이 개탄스럽다”며 검찰 수사를 강하게 비판하는 유서를 남겼다. 국정원장과 동료, 가족과 국민들에게 남긴 유서는 A4용지 9장 분량이다.

 권 과장은 유서에서 “이번 사건으로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을 앞세운 종북 세력에 의해 우리 국정원이 무력화됐다. 남북한 간 치열한 정보전쟁에서 우리가 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정원 요원은 국익을 위해 중국에서 사형을 당할지언정 국내에서 죄인처럼 살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검찰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모든 문건 요구는 검찰이 다 해놓고 책임은 국정원에 떠넘기고 있다”며 “검찰은 한쪽으로 방향을 잡은 채 수사를 했으며 목숨을 걸고 일하는 국정원 요원들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밝혔다. 19시간 동안 조사, 검사의 고압적 언사 등 강압 수사 의혹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그는 지난 22일 오후 1시25분쯤 경기도 하남시 N중학교 앞 주차장의 싼타페 승용차 안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됐다. 19~21일 사흘 연속으로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온 지 20여 시간 만에 번개탄을 피워 자살을 기도했다.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에서 가스중독으로 인한 심장정지와 뇌손상에 대해 저체온 치료를 받고 있으나 사흘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사건 피의자가 자살을 시도한 건 지난 5일 중국 협조자 김모(61·구속)씨에 이어 두 번째다. 특히 권 과장의 자살 기도로 증거조작을 지시한 국정원 ‘윗선’ 규명 수사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증거조작 수사팀(팀장 윤갑근 검사장)에 따르면 권 과장은 지난해 선양총영사관 이모(48·4급) 영사에게 유씨 출입국기록 관련 위조문건 3건에 대해 허위 영사확인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해당 문건들은 국정원 김모(48·구속·일명 ‘김사장’) 조정관이 입수해온 거였다.

 수사팀은 또 그가 위조문건 입수과정, 협조자에 대한 정보활동비 결제 등 지휘·보고라인의 중간고리 역할을 했다고 보고 집중 조사했다. 김 조정관, 이 영사의 선임자인 그가 상급자인 이모(3급 처장) 대공수사팀장에게 보고한 흔적이 있다고 봤다.

 그러나 수사팀은 첫날인 19일 오전 11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쯤까지 19시간을 조사한 데 이어 20일 8시간을 더 조사했다. 이어 21일 오후 2시20분 재소환했으나 권 과장은 담당 검사와 “문건 위조를 지시, 보고했느냐”를 놓고 심한 언쟁을 벌인 뒤 두 시간여 만에 청사를 뛰쳐나갔다고 한다. 이후 권 과장은 국정원 동료 직원들에게 “27년간 대공(對共)수사를 하며 국가를 위해 평생 헌신했는데 위조·날조범으로 몰리는 현실이 너무나 답답하다”며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겠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또 22일 새벽에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갖은 모욕을 다 당했다”며 “A검사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지금 뭐 하는 거냐’며 나이 많은 나에게 반말까지 했다”고 폭로하는 언론 인터뷰를 했다.

 공안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수사팀이 국정원 요원은 물론 검사들까지 연루된 이번 수사 과정에서 무리한 수사를 한 게 사실이라면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수사팀장인 윤갑근 검사장은 “수사팀은 국정원 대공수사요원들의 헌신과 희생을 훼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어 “수사·공판 검사들에 대한 수사도 진행 중”이라며 “조속히 실체적 진실을 밝힌 뒤 수사를 종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주로 예상됐던 중간 수사결과 발표는 하지 않는 대신 김 조정관 등 구속자 기소 전에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한다는 입장으로 해석됐다.

 ◆일심회·왕재산 잡은 대공 수사관=권 과장은 1987년 해군사관학교 출신 예비역 중위로 옛 국가안전기획부에 특채됐다. 27년간 대공업무를 해온 베테랑 대공 수사관 출신이다. 1996년 아랍인(레바논계) 교수로 위장한 ‘무하마드 깐수’를 수사했고, 2006년 일심회 사건, 2011년 왕재산 사건 등 굵직한 간첩사건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1997년엔 깐수사건의 수사유공자로 보국훈장을 받았다. 국정원 관계자는 “평생 대공 전선에서 헌신한 데 자부심이 누구보다 강한 요원이었다”고 전했다.

글=정효식·이승호·노진호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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