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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공장' 의원입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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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민주당은 지난해 12월 대형마트나 기업형수퍼마켓(SSM) 등에서 판매하는 상품을 지자체가 ‘상생 품목’으로 지정하면 이를 팔지 못하게 하는 내용을 담은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을 국회에 냈다. 만약 지자체에서 닭이나 배추를 상생 품목으로 정하면 대형마트에선 팔 수 없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대한양계협회 등 농·축산단체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개정안이 통과되면 대형마트에 상품을 출하하는 농민의 판로가 막혀 급격히 소득이 감소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난해 3월 새누리당 의원 11명은 국립공원에서 낙서를 하면 1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는 자연공원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한국규제학회는 “그 넓은 국립공원에서 어떻게 집행할지 의문”이라며 “낙서를 징역으로 처벌하겠다는 건 과잉금지 원칙에도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국회의원들이 내는 법안(의원 입법)은 정부 법안과는 달리 규제개혁위원회의 심의를 받지 않는다. 규제 개혁의 사각지대가 국회다.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한 20일의 규제개혁 끝장토론에선 “봄이 오면 쳐들어오는, 황사와 같은 존재가 의원 입법”(김도훈 산업연구원장)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실제 한국규제학회가 19대 국회에서 지난해 5월까지의 의원 입법 4528건을 분석한 결과 16.7%(755건)가 새로운 규제를 담았다.

 규제가 만들어진 직후 새로운 규제가 등장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대기업의 면세점 매장 수를 제한하는 관세법 시행령은 점포 수를 기준으로 대기업이 전체의 60% 미만, 중소·중견기업은 20% 이상을 유지하는 내용이다. 현재 대기업 비중은 52.8%, 중소·중견기업은 19.4%다. 이 시행령만으로도 대기업은 신규 매장을 내기 어려운데 민주당은 “규제 효과가 크지 않다”며 대기업 점유율 상한을 50%로 낮추는 법안을 냈다. 시행령이 만들어진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다.

 무늬는 의원 입법이지만 정부 입법인 것도 있다. 의원 입법의 형식을 취하면 차관회의나 예산 걱정 없이 손쉽게 발의가 가능하기 때문에 정부부처가 의원 입법을 통해 우회적으로 규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내년 1월부터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기준치를 넘는 국산차 구입자는 탄소세를 내야 한다. ‘국산차 역차별’ 논란을 일으킨 저탄소차협력금(탄소세)제도 때문이다. 환경부가 주도한 정책이지만 정작 관련 법안인 ‘대기환경보전법 개정안’을 낸 건 새누리당 최봉홍 의원이다. 이른바 ‘청부 입법’을 통한 규제 생산의 대표적 사례다.

 새로운 규제를 양산한다는 비판 속에 의원 입법은 급증하고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17대 국회 때 의원 입법은 6387건에서 18대 1만2220건으로 늘었고, 19대 국회에선 이날까지 8821건이다. 입법조사처 인사는 “시민단체들이 국회의원 평가를 할 때 법안 숫자를 평가기준에 포함시키는 바람에 의원들이 ‘묻지마 발의’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물론 의원 입법 중 공무원의 횡포를 막거나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유성진 이화여대 스크랜튼학부(정치학) 교수는 “의원 입법이 소수자의 의견이나 큰 방향의 정책이 반영하지 못하는 입법 수요를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필요성은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 김한길 대표도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무차별적인 규제 철폐는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주찬 광운대 행정학과 교수는 “의원 입법으로 나쁜 규제가 양산되지 않도록 국회가 스스로 품질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병건·문병주·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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