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수 기자의 자연, 그 비밀] 얼마나 추위 견뎌야 꽃 필까 … 봄꽃 속 생체시계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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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피어난 개나리꽃에 눈이 쌓였다. 봄꽃이 피어나기 위해선 일정한 냉각량이 필요하다. 하루 중 최저·최고·평균기온 등에 의해 매일매일의 냉각량이 결정된다. 이 값은 일기장에 기록되듯 겨우내 쌓인다. [중앙포토]

올봄 서울에서 개나리는 오는 25일에, 여의도 윤중로 벚꽃은 다음 달 8일에 필 거라는 기상청 예보가 있었다.

 기상청은 봄꽃 개화시기를 2월 평균기온과 3월 예상 평균기온을 바탕으로 지점별 특성과 강수량 등을 감안해 통계학적인 방법(회귀분석)으로 예측한다. 수십 년 쌓인 관측자료 덕분이지만 3월 기온 예측이 틀리면 개화시기도 빗나가게 된다.

 봄꽃이 피는 시기는 2~3월 기온의 영향을 크게 받지만 그보다 훨씬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결정된다. 북반구 온대지역의 낙엽식물이 봄꽃을 준비하는 것은 한 해 전 여름부터다. 하지(夏至)가 지나고 낮이 짧아지면 식물의 조직 일부가 꽃눈으로 분화한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9개월 전부터 준비에 들어가는 셈이다.

 꽃눈 조직은 가을까지 자라다가 날씨가 차고 건조해지면 잠에 빠져 든다. ‘내생휴면(內生休眠)’이다. 이 잠에서 깨어나 꽃을 피우려면 일정 시간 추위를 겪어야 한다. 추위의 총량, 즉 냉각량(冷却量·저온요구량)을 채워야 한다. 가을에 철 모르고 꽃을 피웠다가 뒤 이은 추위에 얼어 죽는 낭패를 피하게 해주는 식물의 생체시계다. 냉각량은 식물 종마다 다르다. 식물 고유의 기준온도, 하루 중 최저·최고·평균기온 등에 의해 매일매일의 냉각량이 결정된다. 이 값은 일기장에 기록되듯 겨우내 차곡차곡 쌓인다.

 겨울이 깊어지고 냉각량이 정해진 수치에 도달하면 식물은 마침내 잠에서 깨어난다. 개화를 막는 장애물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지만 추위가 남아 있으면 강제휴면(환경휴면) 상태가 유지된다. 겉으로는 잠을 계속 자는 것처럼 보인다. 강제휴면까지 해제되고 꽃이 피려면 ‘따뜻한 온도’에 일정 시간 노출돼야 한다. 냉각량처럼 정해진 만큼의 가온량(加溫量·고온요구량)이 쌓여야 한다.

 국가농림기상센터 김진희 박사는 개나리의 냉각량은 ‘-90’, 가온량은 ‘128.5’이고, 벚꽃의 냉각량은 ‘-100’, 가온량은 ‘158’이라고 산출했다. 벚꽃이 피려면 개나리보다 더 오래 추위를 겪어야 하고, 따뜻한 날도 더 많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런 수치를 활용하면 장기 관측자료가 없어도 지점별 개화시기를 예측할 수 있다. 이론상으로는 가을부터의 기온과 봄의 예상 기온만 있으면 된다.

 물론 개화시기를 조절하는 과정을 더 파고 들어가면 낮의 길이와 기온 변화를 감지하는 식물의 여러 유전자와 거기서 생산된 단백질들이 등장한다. 분자생물학자들의 노력으로 언젠가 그마저도 낱낱이 파헤쳐질 것이다.

 문제는 지구온난화다. 겨울이 짧아지고 봄꽃 개화시기는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 1970년대 서울에서 4월 11일에 피던 벚꽃이 요즘은 4월 7일이면 핀다. 온난화가 계속되면 50년 뒤 서울에서도 지금의 남해안처럼 3월 말에 벚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대신 21세기 말에는 따뜻한 겨울 탓에 냉각량을 채우지 못한 경남 진해의 벚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할 수도 있다. 벚꽃 축제도 사라질 거란 얘기다.

강찬수 환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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