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치산 "그 드라마 봤나"… 김수현에 10억 쓴 중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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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장쑤위성TV의 ‘최강대뇌’ 녹화장에서 여성 스카프를 고르는 김수현. [이매진차이나·신화=뉴시스·SBS 캡처]

한국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이하 별 그대)’가 중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장쑤(江蘇)위성TV는 버라이어티 쇼 ‘최강대뇌(最强大腦)’에 별 그대 주연배우 김수현(26)을 출연시키기 위해 8시간 체류에 600만 위안(약 10억4300만원)을 썼다. 최강대뇌는 국제적 저명인사들을 초청해 지식과 집중력을 테스트하는 프로그램이다. 녹화를 위해 8일 난징(南京)을 방문한 김수현에게 출연료 300만 위안(5억2170만원)과 전세기를 제공했고 보안요원 600명을 동원했다.

1회 출연료 5억에 전세기·보디가드

사진 위는 왕치산 중앙기율위 서기, 아래는 중국에 ‘치맥’ 열풍을 일으킨 ‘별에서 온 그대’의 전지현. [이매진차이나·신화=뉴시스·SBS 캡처]

녹화장에 3중 검문대를 설치해 관객의 가방·카메라·음료수 반입을 전면 통제하는 사상 초유의 경호도 제공했다. 한 달 전부터 5000위안(87만원)에 판매한 입장권은 인터넷에서 3만 위안(522만원)짜리 암표도 매진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김수현이 중국의 여심(女心)을 공략하는 사이 전지현(33)은 중국 여성의 주머니를 공략했다. “눈 오는 날엔 치맥(치킨+맥주)인데…”라는 극중 대사 한마디가 중국의 조류독감을 잠재웠다. 치킨 열풍이 일어 코리안타운 치킨집마다 장사진을 이뤘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8일 1면 기사에서 장쑤성의 한 임신부가 며칠 동안 치맥을 먹으며 밤새 별 그대를 몰아보다 유산할 뻔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극중에서 천송이(전지현 분)가 바른 핑크 립스틱은 중국 관광객 손에 명동 일대 백화점서 자취를 감췄다. ‘천송이노믹스’란 신조어를 만든 전지현은 21일부터 상하이와 최근 테러가 발생한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시를 방문해 별 그대 열풍을 이어갈 예정이다.

 별 그대는 중국인들에게 마오쩌둥(毛澤東)어록을 새삼 펼쳐보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마오가 1930년 린뱌오(林彪)에게 당시 정세를 분석해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인 “작은 불씨가 광야를 불태울 수 있다(星星之火 可以燎原)”는 말을 84년 뒤 한국 드라마가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별 그대의 중국명(來自星星的爾)이 마오의 말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광저우에서 발행되는 시사지 ‘남도주간’은 최신호에서 ‘싱싱즈화(星星之火)’란 제목으로 별 그대의 인기 원인을 분석하는 기사를 실었다.

"한국 드라마 왜 중국 점령했나”

 별 그대 열풍은 지난주 당내 서열 6위인 왕치산(王岐山) 중국 중앙기율검사위 서기가 화룡점정을 했다. 5일 오후 양회(兩會)에서 베이징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다.

베이징인민예술극원의 장허핑(張和平) 원장이 예술 분야의 발전과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왕치산 서기가 갑자기 발언을 끊었다. “인터넷에서 인기인 드라마 봤나, ‘싱싱(星星)’ 뭐라던데.” 대표단이 조용해졌다. 젊은 대표가 ‘별 그대’를 얘기했다. “맞다. 관원들은 모두 모르는군.” 회의장에 웃음보가 터졌다. “한국 드라마가 왜 중국을 점령했나? 왜 바다 건너 미국과 심지어 유럽까지 영향을 끼치나? 몇 년 전에 그들은 ‘강남스타일’도 내놨다. 나는 시간이 나면 가끔 한국 드라마를 본다. 반나절쯤 보고 깨달았다. 한국 드라마는 우리를 앞섰다. 한국 드라마의 핵심과 영혼은 바로 전통문화의 승화(昇華)다.” 회의장에 웃음기가 가셨다.

 왕치산 발언의 반향은 컸다. WP는 왕치산 발언 이후 중국에서 한국과 같은 드라마를 만들지 못하는 원인에 대한 치열한 논쟁 과정을 보도했다. “나의 날개와 상상력은 부러졌다.” “한국 드라마 이상의 문제다. 중국의 문화적 자존심이 상처를 입었다”는 정치협상회의 대표들의 각종 발언을 소개했다.

 연예평론가 란언파(蘭恩發)는 “왕치산의 발언은 국가예술단에 창신·개혁·시장감각이 필요하며 ‘별 그대’는 이를 집대성한 작품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중국 전통문화를 어떻게 승화시킬 것인지 재고하라는 지시며, 한국 드라마도 하는데 중국 예술가는 왜 못하느냐는 엄중한 질책이라는 의미다.

 ‘남도주간’은 한국의 거대한 ‘드라마 경제(韓劇經濟)’ 시스템을 분석한 뒤 경쟁 시스템을 자세히 소개했다. 공영 방송 외에 2010년 종합편성채널을 허가하고 케이블방송이 가세하면서 현재의 경쟁식 생산 시스템이 완성됐다는 평가다. 여기에 매일 2000m달리기, 2시간의 요가 등 가혹한 스타 제조 시스템을 통과한 신예 아이돌이 매년 150여 팀이 나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한류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WP "중국 문화 자존심 상처”

 이러한 중국 지도부의 각성에 따라 전문가들은 별 그대 현상이 휴대전화 따라잡기의 재판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화웨이·레노보·ZTE를 지원해 스마트폰 분야에서 ‘타도 삼성’에 나선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창조 산업에서의 ‘진격 명령’이라는 해석이다. 임대근(글로벌문화콘텐트학)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중국이 한국 영상산업의 벤치마킹에 나선다는 신호”라며 “산업 우위를 유지하면서 공조를 강화하고 또 다른 우위 산업 개척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한다.

신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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