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금 밀려 죄송해요" … 모녀 셋 안타까운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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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모녀가 숨지기 전 서랍장 위에 남긴 봉투에는 70만원이 들어 있었다. 월세 50만원과 공과금 20만원을 합한 액수였다. [사진 서울지방경찰청]

서울 송파구 석촌동 지하 1층 33㎡짜리 월셋집. 지난 26일 오후 8시30분쯤 이곳에 살던 세 모녀가 안방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어머니 박씨(61)는 침대 옆 전기장판에, 큰딸 김모(36)씨와 작은딸(33)은 평소 사용하던 이불을 깔고 누워 있었다. 경찰이 집 안으로 들어가보니 창문은 청테이프로 막혀 있었는데, 방 안에 번개탄을 피운 흔적이 발견됐다. 침대 머리맡에는 이들과 함께 지내던 작은 고양이 한 마리도 웅크린 채 숨져 있었다.

집주인 임모(73)씨는 “이번 달 전기요금이 얼마인지 알려주려고 일주일 전부터 찾아갔지만 인기척이 없었다”며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문과 창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어 경찰에 신고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숨진 방 서랍장 위에는 5만원짜리 지폐 14장이 담긴 흰색 봉투가 놓여 있었다. 겉면에는 검정 사인펜으로 ‘주인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지난 1월부터 50만원으로 오른 이 달치 방세와 가스비 12만5420원, 전기세·수도세 등을 합한 돈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외부인 출입이나 타살 흔적이 없고 번개탄을 피운 점 등으로 미뤄 동반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들이 살던 집에선 600원짜리 번개탄 2개와 1500원짜리 숯, 20원짜리 편지봉투를 산 영수증이 발견됐다.

 세 모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생활고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이들은 8년 전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8만원이던 이 집으로 이사왔다. 방 두 칸, 화장실 하나가 딸린 비좁은 곳이었다. 아버지 김모씨가 12년 전 방광암으로 숨지면서 거액의 빚을 안은 상태였다. 투병 과정에서 막대한 치료비도 들었다. 여기에 아버지 김씨는 죽기 전 딸들의 이름으로 신용카드까지 발급받아 사용했다. 경찰에 따르면 두 딸은 이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됐다.

 이 때문에 두 딸은 변변한 직업을 잡지 못했다. 당뇨와 고혈압 증세가 있던 큰딸은 외출 자체가 불편했다. 만화가를 꿈꾸던 작은딸 역시 편의점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최근엔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한다. 작은딸 김씨가 그린 만화 습작노트엔 “뭔가 비참한데… 하긴 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 비참한 상황이었으니”란 글이 적혀 있었다.

 결국 생계는 어머니 박씨의 몫이었다. 박씨는 롯데월드 인근 식당에서 일하며 집세를 꼬박꼬박 낼 정도로 성실했다. 하지만 1월 말께 넘어져 오른팔을 다쳐 깁스를 하고 식당일을 나가지 못하게 되자 생활고가 닥쳤다.

이들은 정부 도움 등도 받지 못했다. 송파구청 관계자는 “박씨가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으로 수급 신청을 한 기록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딸들의 외삼촌은 “평소 자존심이 강해 도와주려 해도 한사코 사양했다”며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안타까운 선택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승호·채승기 기자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집주인에게 70만원 봉투 남겨
동반자살 일주일 만에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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