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조 백일장] 2월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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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초대시조

밥도    - 이종문(1955~)

나이 쉰다섯에 과수가 된 하동댁이

남편을 산에 묻고 땅을 치며 돌아오니

여든 둘 시어머니가 문에 섰다 하시는 말

시조는 우리말의 시입니다. 한시가 뜻의 시라면 시조는 소리의 시, 말의 시입니다. 순우리말로 시조를 썼을 때 더욱 빛이 나는 이유입니다. 유식한 척 한자를 써 봐야 오히려 시조의 맛과 격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소리글자인 한글 창제로 우리글로 우리네 희로애락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좋은 시조는 해석이 필요 없습니다. 누구나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우리글로 지어졌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시조 감상은 우리말이 거느리는 무한 세계를 실감실정(實感實情)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종문의 시조 ‘밥도’ 속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며느리의 심정을 헤아리는 일, 그것은 곧 나 자신을 만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경상도 사투리 ‘밥도’라는 축약어는 기막힌 반전이요, 화룡점정입니다. 이 한마디에는 어찌할 수 없는 생의 눈물과 청량제 같은 웃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시인은 한 수의 시조 속에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시조가 지닌 묘미입니다. 어쩌면 우리 시조가 서야 할 모습, 가야 할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권갑하(시조시인)

이종문

◆이종문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정말 꿈틀, 하지 뭐니』 등
중앙시조대상 등 수상.

장원

입술   - 이상익

이것은 칼이다
꽃잎으로
위장한,
당신을 벤
상처가
선홍으로 번질 때
피고 진
숱한 말들이
문신처럼 남는다

이상익

◆이상익=1967년 전북 부안 출생. 전북대 문헌정보학과 졸업. 호원대 도서관 사서.

차상

초록의 근육
황경순

빈 들녘 채워 넣는 자투리 미나리꽝
동지섣달 살얼음이 가슴까지 차올라도
진흙 속 갓 올라온 새순
음계처럼 피워낸다
 
제 몸 얼지 않으려 비비는 마디마디
거머리 떼 아무리 빨판을 붙여대도
한겨울 초록의 근육
수렁논을 일으킨다
 
시린 발 개흙 속을 비틀대는 구릿빛
안개 속 헤매던 실업의 긴긴 날
귀농한 둠벙골 홍씨
하루해가 짧다.

차하

바닥재 할인 매장
김태경

거품을 쫙 뺐어요
가격까지 바닥입니다
오를수록 미끄러지는 빙판에 서 계신 분
엠보싱 강화마루로 바꾸어 보시라니깐
 
더 내려갈 데가 없어 몸 뉠 곳도 없다고요?
낙엽송 잎들처럼 우수수 떨어졌다고요?
그렇담 사계절 푸른 잔디밭이 딱 좋네요
 
바닥 치며 울어봤자 손바닥만 아립니다
바닥을 차고 오를 파이팅만 외친다면
등 시린 밑바닥에도
봄은 와락!
온다니깐

심사평

나무는 두 계절을 앞서 산다고 한다. 가을 낙엽을 떨구면서 이듬해 봄에 잎과 꽃을 피우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러기에 겨울을 견딘 생명들이 아름다운, 기꺼운 것이다. 시조의 오랜 겨울을 견디고, 느꺼운 시조를 피우기 위한 젊은 시인들은 어떻게 겨울의 신산(辛酸)을 견뎠을까.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중앙일보 지상백일장일 것이며, 여기에 그 통증으로 잉태한 풋풋함을 뽑아 올린다.

 이 달에는 이상익씨의 ‘입술’에 눈길이 머문다. 이 자리에서 단수 시조를 장원으로 선한 적은 없는 것 같다. 함께 보내온 시조 세 편이 모두 단수인데, 이 작품은 단수가 갖는 장점을 제대로 보여준다. 잎사귀 하나만 봐도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처럼, 부분으로 전체를 보여주는 시조의 본령을 제대로 보여주는 촌철살인이다.

 차상은 황경순씨의 ‘초록의 근육’을 선한다. 제목의 참신함만으로도 눈길이 가지만, 살얼음 언 미나리꽝의 저 밑바닥부터 시작되는 봄의 박동을 시적 인물의 삶에 빗댄 것도 좋았다. 요즘 시조들 가운데 현대적 감각의 반영 운운하며 육화되지 않고 신기한 것만을 좇아 현대문명의 소재들만 나열하여 깊은 맛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유행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장점인 건강한 서정을 안정감 있게 잘 살려냈다.

 차하는 김태경씨의 ‘바닥재 할인매장’이다. 이 시대를 견디는 서민들의 소소한 일상을 절제된 감정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바닥 치는 경제의 겨울을 견뎌야 하는 서민들의 통증을 보여주고 있다. ‘등 시린 밑바닥에도 ‘와락!’오는 시조의 봄을 기대해 본다. 겨울을 견딘 이 달에는 응모된 원고의 질도 양도 풍부하고 깊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경합이 치열했다.배원빈·박한규·이복열·오서윤씨의 작품들도 심사위원들이 손에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음을 알린다.

심사위원=오승철·이달균(대표집필 오승철)

◆응모안내=매달 20일 무렵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해 그 달 말 발표합니다. 장원·차상·차하 당선자에게 중앙시조백일장 연말장원전 응모 자격을 줍니다. 서울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10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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