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차림보다 삶 … 원조 멋쟁이는 노는 물이 달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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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호 26면

저자: 쥘 바르베 도르비이 출판사: 이봄 가격: 1만3000원

TV를 켜면 뽀얀 피부에 V라인 얼굴, 호리호리한 몸매로 뭇 여자 기죽이는 ‘예쁜 남자’들이 판을 친다. 백화점 남성복 매장에 펑퍼짐한 옷은 없다. 군살 없는 몸매를 드러내는 슬림피트 디자인이 대세다. 취업을 위해 화장, 피부관리는 물론 성형까지 고려해야 할 정도로 ‘예쁜 남자’ 되기를 권하는 사회다. 남성잡지들은 ‘댄디’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유행을 선도한다. ‘댄디’들은 애초에 어떻게 탄생한 걸까?

『멋쟁이 남자들의 이야기 댄디즘』

대략 ‘멋쟁이’로 통하는 이 ‘댄디’라는 단어는 사실 유래가 깊다. 18세기 말~19세기 초 서구 근대 시민사회 형성기의 혼돈 속 산업혁명과 계급혁명이 낳은 독특한 산물이다. 허위의식에 젖은 귀족계급의 추락과 속물근성 부르주아 계급의 부상이 교차하던 시대에 어디에도 섞이지 않고자 오직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젊은이들이 바로 ‘댄디’다. ‘댄디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정립한 19세기 프랑스 작가 쥘 바르베 도르비이는 21세기 ‘무늬만 댄디’들에게 진정한 댄디즘의 이상을 설파한다.

바르베는 ‘우아한 넥타이 매듭의 창안자’ 18세기 영국 한량 조지 브러멀을 ‘댄디의 원조’로 삼아 그에 대한 신화를 구축한다. 귀족 신분도 아닌 브러멀은 아름다움을 숭배한 조지 4세의 총애를 받아 사교계의 총아가 됐다. 댄디즘이란 옷차림이 아닌 삶에 대한 태도와 매너에 있다는 보들레르의 말처럼 브러멀은 육체를 넘어 지성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명석함, 여론을 이끄는 힘, 날카로운 위트로 일관된 그의 대화는 침묵마저 힘이 있었다. 힘을 이용해 욕망을 채운 다른 권력자들과 달리 다른 대상에 대한 열정도 욕망도 없는 무관심과 냉정함이 그를 유니크한 ‘댄디’로 군림하게 했다. 비록 빚더미에 올라 프랑스로 도주해 초라한 말년을 맞았지만, 한때 그의 도피처 순례여행이 유행했을 정도로 영국인들에게 그는 영원한 댄디였다.

저자 스스로 사실이 아닌 인상에 의지한 역사라고 인정하듯, 바르베의 저술은 관념에 치우친 인상이다. 댄디로서의 본질이 외모가 아닌 내면에 있다면서도 내면을 짐작할 법한 대화는 번역으로 그 정신이 전달될 수 없다며 생략해 버렸고, 독자는 실체 없는 무수한 수사들 속에서 그의 환영을 추측할 뿐이다.

오히려 미술사학자 이주은이 당대의 그림 속 미남자들에게서 발견한 댄디의 키워드 10가지에서 그 실체를 가늠할 수 있다. 귀족의 화려한 복장에 저항하듯 검정 프록코트를 입고 나타난 댄디는 무절제한 귀족과 부르주아의 실용을 모두 경멸하며 자기만의 취향을 신봉했다. 군중들은 기술과학이 가져온 세상의 변화를 찬양했지만 댄디는 물질적 진보로 잃어버린 영역이 있음을 아는 자들이었다. 그 상실감 때문에 세상사에 개입하지 않고 홀로 아름다움에 헌신하며 세상을 견뎠다. 세속적이고 부패한 사회를 대신할 이상세계를 꿈꾼 낭만주의자, 무릇 댄디라면 현실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지 않아야 했다.

국내 최초의 댄디즘 연구자 고봉만 교수는 진정한 댄디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타인이 예상치 못한 일을 할 것,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것, 우월하기에 타인과 구별되는 독립성을 가질 것’으로 정리하고 이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냉정함을 꼽는다. 이상적 댄디는 자신의 진면목을 숨기고 내적인 진실에 완강히 침묵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시대의 혼돈에서 발을 빼고 아름다움에 탐닉했던 탐미주의자 댄디는 열정 없는 냉담함과 귀족적 우아함으로 숭배의 대상이 됐다. 과연 이 시대의 댄디들도 그런 초월적인 존재들일까. 무한경쟁사회에 외모지상주의까지 더해진 팍팍한 세상을 버티기 위해 스스로의 신체를 상품화시키는 안타까운 발버둥은 아닌지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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