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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왜 조선이냐고? 왜 로마냐고 묻는 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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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혁명 1, 2
김탁환 지음
민음사, 1권 272쪽, 2권 260쪽
각권 1만2500원

조선은 빛바랜 왕조가 아니다. 소설과 영화·드라마 등에서 끊임없이 변주돼,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롭게 해석되는 살아 숨 쉬는 오늘이다. 그런 조선을 하나로 꿰는 작업은 녹록지 않은 일이다.

 국내 대표 역사소설가이자 이야기꾼인 김탁환(46)이 그 지난한 길, ‘소설 조선왕조실록’이란 대장정에 나섰다. 500여 년 조선의 역사를 소설로 재구성하는 대규모 역사(役事)다.

 첫 발은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의 기록을 담은 『혁명』(전2권, 민음사). 그의 출사표는 자못 비장하다. “‘소설 조선왕조실록’은 정사와 야사, 침묵과 웅변, 파괴와 생성의 세계를 넘나들며 인생과 국가를 탐험할 것이다. 거대한 퍼즐을 맞추듯 조선을 소설로 되살리겠다.”

 그가 만들어 낼 퍼즐의 모양과 색깔이, 각각의 퍼즐이 얽히며 그려낼 모자이크가 궁금했다. 11일 그를 만났다. 그런데 왜 조선일까.

소설가 김탁환이 조선을 거울삼아 오늘을 살피고 미래를 찾아보려 한다. ‘소설 조선왕조실록’은 그 모색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에게 왜 로마냐고 묻는 것과 같다. 나에게는 조선이 그런 대상이다. 제대로 된 역사소설의 형태를 갖추기 위해 한 왕조를 택한다면 조선밖에 없다. 더 중요한 건 르네상스가 조선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해서다. 근대적 사유로 국가를 통치하고 운영하려는 고민이 시작된 지점이 조선이다. 그 500여 년을 훑는 것이 의미 있다.”

 출발선에서 예상하는 도착점은 조선을 다룬 60여 권의 책이다. “따져 보니 지난 15년 동안 13편의 소설, 총 35권의 책을 썼다. 앞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를 적어봤다. 10개쯤 됐다. 앞으로 15년 더해 30년간 60여 권은 쓰겠더라.”

 조선이란 큰 그림의 퍼즐 맞추기는 이런 식이다.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사건과 인물은 신작으로 발표하고 이미 다뤘던 부분은 출간된 기존 소설을 보완·수정해 펴내는 것. 『불멸의 이순신』과 『허균, 최후의 19일』, 박지원과 홍대용 등 북학파 의 이야기를 다룬 ‘백탑파 시리즈’ 『방각본 살인 사건』과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 등의 작품이 ‘소설 조선왕조실록’의 이름으로 묶일 수 있다.

 “교향곡 같은 거죠. 악기마다 각각의 음색에 맞춰 작품을 만들고 전체에 맞춰 조율하는. 한 시각이나 하나의 문체로 작품을 쓰지는 않을 겁니다.”

 이야기에 따라 인물이 중심이 될 수도, 사건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장르 제한도 없다. 추리소설부터 러브스토리까지, 조선이라는 거대한 고택에 들어서는 문은 여러 개라는 말이다.

 “A 작품의 주연이 작품 B에선 조연이 될 수 있어요. 추리소설에서 중요한 텍스트가 다른 작품의 소재가 될 수도 있죠. 조선시대에 이야기를 할 때 썼던 모든 테크닉을 구사하려구요. 서구의 문학 장르도 가져올 수 있죠.”

 이번 소설이 그렇다. 조선 개국을 앞두고 공양왕 4년(1392년) 3월 17일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할 때부터 정몽주가 암살당하는 순간까지 18일을 그린 이번 작품에도 그는 편지와 가전체, 동물우화·여행기 등 당시 신진사대부가 애용하던 다양한 문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김씨는 시대 순에 맞춰 소설을 쓸 생각은 아예 없다. 시대를 염두에 두고 시리즈의 번호를 매긴다면 뒤죽박죽이 되고 말겠지만.

 “시대 순으로 역사를 보려면 ‘한국사 시리즈’를 보면 됩니다. ‘소설 조선왕조실록’은 지금 나의 문제 의식을 풀어내는 데 적합한 인물과 갈등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서 ‘오늘의 한국’에 맞춰 조선을 읽는 일이에요. 어느 시절을 먼저 다루게 될지는 몰라요.”

 그러니까 ‘소설 조선왕조실록’의 1번 타자가 정도전인 건 조선을 연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오늘의 한국을 고민하는 데 그가, 그 시기가 제격이었다는 설명이다.

 “정도전은 혁신의 아이콘이에요. 당시의 판과 패러다임을 바꾸려 했던 인물이죠.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70여 년이 다 돼가죠. 건국 이후 70여 년이 지난 초기 조선도 역사 논쟁 등 혼란으로 가득했어요. 역사상 나라를 세우고 100년도 되기 전에 망한 국가가 많았지만 조선이 초기의 혼란을 딛고 오랜 역사를 지속할 수 있었던 건 국가의 설계도를 준비했던 정도전이라는 혁신가가 있어서에요.”

 그의 이야기는 한 곳을 맴돌지 않았다. 흥미진진한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갔다. 그럼에도 뿌리는 튼튼했다. 이유는 그가 강조하는 ‘사실의 엄정함’ 덕이다.

 “석사 논문을 쓴다고 생각하고 관련 자료를 읽고 공부합니다. 공부가 끝난 지점에서 학자는 논문을 쓰지만 나는 상상을 쓰죠. 사료가 없는 역사의 빈틈, 검은 구멍을 메우는 겁니다.”

 역사의 빈틈을 채워나가는 그의 상상을 이끄는 나침반은 지금 우리와의 연관성이다. 그의 작품이 TV드라마나 영화 원작으로 각광받는 이유기도 하다. 예로 든 작품이 소설 『나, 황진이』다.

 “조선시대에는 황진이를 창녀로 여겼죠. 하지만 저는 황진이를 서경덕 살롱의 마담, 말하자면 ‘한국판 조르주 상드’로 봤어요. 황진이가 예술가로 어떻게 성숙하고, 젊은 학자들의 대모가 되는가가 질문의 요지였고, 그런 색다른 접근이 인물에 현재성을 부여한 거죠.”

 조선을 한눈에 꿰려는 그에게 지금 가장 매력적인 조선의 인물은 누구일까.

 “세종이에요. 르네상스적인 인간이면서 노련한 정치가죠. 절정의 고수에요. 발상이 다른 인간이기도 하고. 이순신을 쓰는 데 10년이, ‘백탑파 시리즈’에서 박지원까지 가는 데 10년이 걸렸어요. 세종을 쓰려면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텐데, 못 쓰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글=하현옥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탁환=1968년 경남 진해 출생. 서울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 방대한 자료 조사와 고증이 돋보이는 역사소설을 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여러 작품이 TV 드라마, 영화로 옮겨졌다. 장편소설 『불멸의 이순신』 『방각본 살인 사건』『리심, 파리의 조선 궁녀』『노서 아가비』『뱅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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