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1)제41화 국립경찰 창설(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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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장택상 청장 피습>
해방 이듬해까지도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치안상태는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폭력배들이 화물자동차를 남의 집 문 앞에다 버젓이 세워놓고 재산을 약탈해 가는가 하면 청계천에는 사람의 목이 잘려 굴러다니는 판이었다. 서울시내에는 하루 저녁에 평균 40건의 강도사건이 발생하고 도둑은 신고조차 되지 않았다.
경찰간부들 가운데도 중부서장 S씨 같은 사람은 「테러」의 공포 때문에 출퇴근시에는 정복을 못 입고 사복으로 갈아입는 처지였으니 그야말로 한심한 지경이었다.
여기다 좌익과 우익의 정치적인 충돌이 겹쳐 사회는 공포분위기에 싸여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장택상씨가 수도청장이 되면서 수표동 그의 자택에는 40명의 경호경찰관이 고정 배치돼 갑·을부로 나뉘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24시간 경비를 했다.
그처럼 삼엄한 경비 속에서도 한 때는 밤마다 주먹만한 돌이 집안으로 날아들어 기와가 깨지고 장독대 위의 항아리가 박살났다. 집안 식구들은 그때마다 바깥출입도 못하고 수류탄이라도 날아들까봐 겁에 질려 떨어야했다.
장택상씨는 송진우씨 피습사건에 충격을 받아 수도청장이 된 뒤에도 부인과 함께 밤마다 방을 옮겨가며 자야했다.
출근 때는 장씨가 탄 「링컨」승용차에 호위경관 2명을 태우고 다녔으나 나중에는 차 앞에 기관총을 내건「지프」가 「칸보이」하고 승용차 주위에는 6대의 「사이카」가 호위를 했다.
당시 수표동에서 수도청(현 치안국별관)에 이르는 길가의 어린이들은 아침저녁으로 장 청장의 출퇴근 행차를 구경하러 몰려나가 함성을 지르곤 했다.
후일 내무부장관을 지낸 김효석씨는 『수도청장 나들이하는 모습이 어찌나 떨리고 겁이 났던지 길을 가다가 마주치기라도 하면 일부러 그 길을 피해 다녔다』고 나중에 술회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처럼 삼엄한 경비에도 요인들의 목숨을 노리는 좌익「테러」분자들의 음모는 집요하기만 했다.
특히 공산당타도에 직접 앞장서는 경찰고위간부들의 신변은 언제나 불안했다.
장택상씨는 수도청장으로 재임한 3년 동안 무려 9번의 「테러」를 당했다.
그 가운데서도 두 차례는 정말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첫 번째 암살미수사건은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이 있고 난 뒤 한달쯤 지난 46년11월13일이었다.
그날 아침 8시30분쯤 수표동 자택을 나온 장택상씨의 승용차가 수도청으로 향해 을지로2가 전찻길 바로 앞 중앙극장 건너편에 있는 공지부근을 지날 무렵이었다. 골목길에서 별안간 나타난 괴한 2명이 승용차 정면에 수류탄 2개를 던지고 권총을 난사했다.
괴한이 던진 수류탄 1개가 유리창을 뚫고 차안에 떨어졌으나 운전사 정남수 순경이 발로 밀어냈다.
장 청장은 차에 함께 탔던 경호원 하낙규 경사와 함께 뛰어내려 권총을 빼들고 달아나는 범인들의 뒤를 추격, 범인 중 최인식을 체포했다.
이때 장 청장은 차 밖에서 폭발한 수류탄의 파편에 오른쪽 뺨을 다치고 차안에 타고 있던 막내아들 병청군과 막내딸 병초양이 화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생명을 구했다.
이때 검거된 최인식(21)은 미군CIC로 넘겨졌고 도주했던 공범 김룡호는 나중에 체포됐다.
김은 전 조선 민주청년동맹원으로 공산당의 지령을 받고 남하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 이후 장 청장의 승용차 주위에는 언제나 6대의「사이카」가 호위를 하게 됐다. 두 번째 피습 사건은 이른바 「학병동맹」사건의 보복으로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자행된 것이었다.
48년1월24일 상오 10시30분쯤 역시 수표동 자택을 나서 등청하던 도중 첫 번째 피격장소 부근인 장교동33 애광사진관 앞에서 잠복했던 괴한이 던진 소이탄을 맞았다.
장 청장은 무심히 담배를 피우며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중 별안간 유리창이 「쨍그렁」하고 깨지면서 쇳덩어리 하나가 날아와 바른편 손등을 스치고 발 앞에 떨어졌다. 장 청장은 재빨리 바른쪽 창문을 열고 피신하면서 범인을 향해 권총2발을 쏘았다.,
차안에 떨어진 소이탄은 불발이었으나 밖에 떨어진 소이탄이 터지는 바람에 호위경관들의 옷에 불이 붙어 경관들은 길바닥의 눈 위에 딩굴면서 불을 껐다.
이일이 있은 다음부터 수표동 장 청장의 자택에는 수류탄이 날아드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한옥기와지붕 위에도 소방서의 감시탑 모양으로 경비초소를 세우고 밤마다 경찰관2명이 올라가 집 주위를 감시했다. 승용차 앞에는 기관총을 장비한 「지프」한대가 더 붙었다.
이보다 앞서 46년10월16일에는 조병옥 경무부장 살해 미수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하오 1시 서울 중구다동 미장「그릴」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조 부장은 공산당산하단체인 민주청년동맹소속 유주열이 던진 수류탄에 맞았으나 다행히 수류탄이 터지지 않아 목숨을 구했다.
또 46년9월12일에는 평남인민위원회 선전부장 김영수(22)와 공산당원 김광명 등이 국제청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행차중이던 이승만 박사를 저격했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해방직후의 혼란한 질서를 바로잡고 건국을 방해하기 위해 날뛰는 공산당과 맞서야하는 경찰의 활동은 생명을 건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계속><제자 김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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