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들 ‘재산 킬러’ 쉬셴러 … 첫날밤부터 재산 캐물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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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호 29면

1963년 4월 23일, 기자들에게 쉬셴러와의 결혼생활을 설명하는 장멍린(왼쪽). [사진 김명호]
주미대사 시절의 후스(오른쪽). 왼쪽은 장제스의 처남 쑹즈원. 1939년 겨울 워싱턴DC에서.

2010년 10월 저장(浙江)성 위야오(余姚)시는 중국 신교육의 제창자 장멍린(蔣夢麟·장몽린)이 태어난 집에 기념관을 만들었다. 낙성식 날 대학자와 왕년의 일류 정객들이 몰려왔다. 거의가 베이징대학과 중국 역사상 최고 학부였던 시난(西南)연합대학 출신들이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60>

참석자들은 46년 전 타이베이에서 세상을 떠난 장멍린의 일화로 꽃을 피웠다. 세 번째 부인 쉬셴러(徐賢樂·서현락)에 대한 질책과 후스와의 우정을 거론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쉬셴러는 명문 집안 출신이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청(淸) 말의 과학자였고 할아버지는 증기기관과 기선(汽船) 제작자로 명성을 날렸다. 호기심도 왕성했다. 50이 넘은 나이에 무연화약 제조에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천문·지리·병법·수학의 대가였다.

쉬셴러는 어렸을 때부터 키가 크고 예뻤다. 대학시절 남학생들의 곁눈질을 받다 보면 하루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졸업 후 외교부에 있을 때는 선물 들고 찾아오는 외국 외교관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타이완에 나온 후에도 인기는 여전했다. 오랜 친구의 회고담이 신문에 실린 적이 있다. “쉬셴러는 남자를 돈으로 봤다. 남자 돈 털어먹는 재주는 당할 사람이 없었다. 사진이 실물만 못했다.”

대륙시절 쉬셴러는 결혼 경험이 있었다. 상대는 걸출한 군사 전략가 양제(楊杰)였다. 스물아홉 살 때 50이 다된 양제를 만났다. 양제는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참모장이었다. 쉬셴러는 결혼 몇 달 만에 남편의 통장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장제스는 군에 추종자가 많은 양제를 경계했다. 총으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베이지우스빙(杯酒釋兵)을 구사했다. 한 손으로 술을 따라 주며 다른 한 손으로는 장군 계급장을 떼버렸다. 양제는 소련대사로 나가기 직전 이혼을 요구했다. 남편이 빈털터리가 된 것을 확인한 쉬셴러는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줬다. 결혼 7개월 만이었다. 2년 후 장제스는 양제를 파면시켰다.

귀국한 양제는 반(反)장제스 운동의 선봉에 섰다. 1949년, 홍콩의 프랑스 식당에서 총탄세례를 받았다. 쉬셴러는 지독한 여자였다. 소식을 듣고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며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풍류를 즐겼다.

1960년, 쉬셴러에게 넋을 잃은 장멍린은 중매인을 통해 편지를 보냈다. “쉬 여사는 훌륭한 집안에 태어난 사람답게 품행이 단정하다. 칠십여 년을 사는 동안 이렇게 내 마음을 들뜨게 만든 여인이 없었다.”

쉬셴러가 거절하자 장멍린은 끼니를 거르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도쿄대학 총장이 선물한 우키요에(浮世繪)를 꺼냈다. 그림 위쪽에 붙은 색종이에 시 한 편을 써서 보냈다. 쉬셴러는 요구사항과 함께 결혼을 승낙했다. 장멍린은 딴소리 못하게 기자들 모아놓고 결혼을 발표해버렸다.

베이징대학 동창회는 신문에 반대 광고를 실었다. 입원 중이던 후스도 인편에 편지를 보냈다. 장멍린은 후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찬성이냐 반대냐 그것만 얘기해라.” 후스가 “반대”라고 하자 “편지를 읽지 않겠다”며 찢어서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이를 장멍린의 비서가 몰래 휴지통에서 꺼내 맞춰서 장멍린에게 건넸다.

“우정과 수십 년 전 네 결혼식의 보증인 자격으로 충고한다. 쉬셴러는 돈밖에 모른다. 네게 20만원을 요구했고, 8만원만 주자 불평만 늘어놓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천하의 양제도 나가떨어졌다. 사서 고생하지 마라. 총통과 쑹메이링도 반대한다고 행정원장 천청(陳誠)이 우리 집사람에게 전화했다. 결혼을 강행하면 다시는 너를 볼 수 없다. 네 부인이 우리와 만나는 걸 내버려둘지 잘 생각해봐라.”

장멍린은 장제스와 천청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 사생활이다. 간섭받고 싶지 않다.”

1961년 7월 18일 75세 신랑과 54세 신부의 결혼식이 열렸다. 일가친척이나 친구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신문마다 장멍린이 하객들에게 한 인사말이 도배를 했다. “건전한 생활은 이지(理智)·정감(情感)·의지(意志)가 형평을 이뤄야 한다. 하나만 없어도 균형이 깨진다. 몇 년간 감정을 기탁할 곳이 없었다. 이제야 대상을 찾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장멍린이 계단에서 실족했다. 입원한 사이에 쉬셴러는 장멍린의 재산을 자기 명의로 바꿔버렸다. 사실을 파악한 장멍린은 이혼 소송을 냈다. 쉬셴러도 입장을 밝혔다. “남편은 자신의 모든 것이 이제는 내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약한 여인이다. 괴롭히지 마라.”

기자들이 몰려오자 장멍린도 사실을 실토했다. “결혼 첫날밤부터 재산을 꼬치꼬치 물었다. 스스로 만든 과실은 피할 길이 없다. 대가를 치르겠다. 단, 후스에겐 볼 낯이 없다. 이미 저세상으로 갔으니 지하에서 만나 사죄하겠다”며 후스가 보냈던 편지를 공개했다. 법원은 장멍린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혼 5개월 후 장멍린도 세상을 떠났다. 쉬셴러는 오래 살았다. 2006년 여름, 100살을 며칠 앞두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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