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장멍린, 조강지처와 ‘8년 투쟁’ … 홀로 된 후배 부인과 재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60호 29면

1961년 장멍린의 세 번째 결혼 소식이 들릴 무렵, 중앙연구원장 후스(오른쪽)와 칭화대학 총장 메이이치(왼쪽)는 같은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두 사람은 대륙 시절부터 장멍린의 지우(知友)였다. [사진 김명호]

1934년 5월, 일본 관동군이 허베이(河北)성 북부지역을 장악했다. 중국의 명망가들을 내세워 자치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반일운동의 중심지 베이징대학도 내버려두지 않았다. 학자로 위장한 특무기관원들이 교수들을 찾아 다니며 중·일 양국 간 문화교류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59>

베이징대학 총장 장멍린(蔣夢麟·장몽린)은 자치운동 반대에 앞장섰다. “나는 무조건 반일을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선량한 일본 국민들은 우리의 친구다. 단,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나의 적이다. 중국의 군국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침략의 야욕만 버리면 양국의 문화교류는 저절로 된다.”

이런 장멍린도 감정 조절은 제대로 못했다. 평소 같은 학과 교수이며 컬럼비아대학 후배인 가오런산(高仁山·고인산)의 부인을 좋아했다.

가오런산의 부인 타오쩡구(陶曾谷·도증곡)는 소문난 미인이었다. 미모에 걸맞게 결벽증도 심했다. “사창가 출입하는 교수들이 많다”는 소문을 들은 다음부터 남편 친구들이 집에 오는 것을 싫어했다. “제일 지저분한 것들이 대학교수와 정치가들이다. 집안에 들여놨다간 고약한 병에 옮는다. 만나려면 밖에서나 만나라.”

장멍린과 쉬셴러의 결혼은 한동안 타이베이와 대륙을 떠들썩하게 했다. 오른쪽 첫 번째가 쉬셴러의 전 남편 양제. 장제스의 참모장과 소련 주재 대사를 역임했다.

실제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윤락가 빠다후퉁(八大胡同)의 최대 고객은 대학교수와 국회의원들이었다. 조강지처에게 꼼짝 못하기로 유명한 후스(胡適·호적)와 총장 장멍린만은 예외였다.

1927년 4월, 남방의 혁명 세력을 대표하던 북벌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정변을 일으켰다. 공산당과 결별을 작심한 장제스는 조금이라도 붉은 티가 나면 목을 날려버렸다. 2개월 후, 펑톈(奉天)군벌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이 베이징에서 ‘육·해군 대원수’에 취임했다. 군벌정부의 마지막 국가원수 장쭤린도 공산당이라면 질색이었다. 북방의 좌파 영수였던 가오런산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한밤중에 끌려간 가오런산은 4개월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후스는 부인의 엄명 때문에 근처에 얼씬도 못했지만, 장멍린은 홀몸이 된 타오쩡구를 극진히 보살폈다. 전국을 통일한 장제스가 장멍린을 교육부장에 임명하자 그는 타오쩡구를 비서로 채용했다. 출근도 같이하고 퇴근도 함께했다. 남녀문제에 관대한 장제스는 모른 체했다.

장멍린은 이혼을 결심했다. 조강지처와 8년간 신경전을 벌였다. 집문서와 예금통장 다 내주고 나서야 서류에 도장을 받아냈다. 타오쩡구와 재혼을 서두르자 사방에서 비난이 빗발쳤다. 아무도 우리의 주례와 비슷한 결혼보증인을 서려고 하지 않았다. 후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후스 정도가 보증을 서면 세상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었다.

후스의 부인 장둥슈(江冬秀·강동수)는 장멍린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조강지처를 버린, 형편없는 놈이다. 저런 게 대학 총장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네 친구라는 것들은 어째 전부 저 모양이냐. 너랑 살다 보니 정말 별꼴을 다 본다”며 한바탕 욕설을 퍼붓더니 대문에 주먹만 한 자물통을 채워버렸다. 양복도 물통에 집어 던졌다. 후스는 내복 바람으로 담을 넘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거리가 한산했다. 체격이 비슷한 동료 교수에게 양복을 빌려 입고 결혼식장으로 달려갔다.

장제스와 함께 타이완으로 나온 장멍린은 국사(國師) 대접을 받았다. “국민당은 농민정책이 없어서 공산당에 패했다”며 토지개혁안을 직접 작성했다. 타이완의 토지개혁이 성공한 것은 순전히 장멍린 덕이라고 봐도 된다. 타오쩡구도 퍼스트 레이디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과 함께 전쟁 부상병들을 돌보며 부지런히 살았다.

1958년 타오쩡구가 타이베이에서 병사했다. 집안 조카에게 묘한 유언을 남겼다. “남편은 72세지만 건강하고 힘이 세다. 병원에 올 때마다 간호사들을 힐끔힐끔 쳐다볼 정도로 감정도 풍부하다. 나 죽으면 무슨 주책을 떨고 다닐지 모른다. 네가 나서서 적당한 사람을 찾아 주기 바란다.”

조카는 타이쩡구의 유언을 잊지 않았다. 1년이 지나자 장멍린을 데리고 선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상대가 장멍린이다 보니 만나라도 보겠다는 여인들이 줄을 이었다.

장멍린은 까다로웠다. 보는 족족 퇴짜를 놨다. “키, 생김새, 복장, 머리 모양” 등 이유도 다양했다. 나이 생각 좀 하라고 하면 버럭 화를 냈다. 소문이 타이완은 물론 홍콩과 대륙까지 퍼질 정도였다. 특징도 있었다. 제자들은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며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뜻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1960년 봄 친구 생일잔치에 갔다가 50대 초반의 여인을 소개받았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 나이 제대로 알아보는 남자는 드물다. 장멍린은 30대 여인을 만났다며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댔다. 다음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청혼했다.

입원 중이던 후스도 같은 병원에서 치료받던 친구를 통해 소식을 들었다. 상대가 양제(楊杰·양걸)의 부인이었던 쉬셴러(徐賢樂·서현락)라는 것을 알자 깜짝 놀랐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