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선 단골 불법조업 현장 … 1500t 군함 뜨자 자취 감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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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오전 8시 충남 태안군 신진도 해경부두를 출발한 고속함을 타고 1시간쯤 달리자 멀리 3개의 섬이 보였다. 각각 동·서·북 격렬비도다. 서격렬비도부터 12해리(22.224㎞)가 우리 바다다. 중국과 영해를 맞댄 영토의 끝단 섬이 무인도가 된 건 1994년부터다. 김영삼 정부 시절 ‘작은 정부’를 명분으로 전초기지를 지키던 등대를 무인화했다. 그 뒤 20년간 사실상 버려져 왔다. 접안시설도 없어 큰 배의 정박도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섬에 상륙하려면 배에서 배로 옮겨야 했다. 해경대원들과 기자는 해상에서 10여 명이 탈 수 있는 소형정으로 갈아탔다. 해경대원들이 사선을 넘나들며 불법 조업을 하는 중국 어선을 단속하는 배다. 중국 어선이 파손되면 외교 문제가 될 수 있어 큰 배는 단속에 쓸 수 없다고 했다. 이 때문에 작은 배로 각종 흉기에 맞서다 지난 5년간 해경 2명이 숨지고 68명이 다쳤다. 한 해경대원은 “이 작은 배가 도끼나 삼지창으로 저항하는 중국 어선에 근접해 단속하는 유일한 수단”이라며 “이 배로 우리 땅에 상륙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소형정으로 다가가도 섬에는 접안시설이 없어 배를 자연 암석에 밧줄로 묶어 놓았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바위 위로 뛰어내려야 했다. 배가 파도를 타고 위로 올라갔을 때가 점프해야 할 시기다. 그러나 기자는 타이밍을 잘못 맞춰 배가 내려가는 순간에 뛰어내렸다. 바위 위에서 넘어져 미끄러지는 기자를 먼저 올라가 있던 해경대원이 붙잡아 끌어올려주지 않았더라면…. 기자의 발 아래는 수심 60m의 바다였다.

격렬비열도엔 접안시설이 없다. 섬에 오르기 위해선 작은 배를 대고 암석 위로 뛰어내려야 한다.

 “미끄럽습니다. 조심하세요.”(해경대원)

 오전 10시. 육지를 떠난 지 2시간여 만에 북격렬비도에 상륙했다. 이곳엔 멸종위기의 매가 서식한다. 군데군데 야생동물의 배설물이 보였지만 매는 보이지 않았다. 섬을 동백나무가 덮고 있었다. 1990년까지 민간인이 고구마와 콩을 일구고 바지락과 굴을 잡으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이미 찾기 어려웠다.

 학계에선 격렬비열도가 7000만 년 전 생긴, 국내에서 가장 오랜 화산섬으로 추정하고 있다. 해발 101m인 정상까진 15분여를 걸어 올라가면 된다. 섬의 정상에는 1909년 처음 점등된 12m 높이의 등대, 무인 기상관측 장비, 20년 전까지 관리원이 머물던 빈 숙소가 폐허가 된 채로 있었다. 숙소엔 몇 해가 지난 달력, 오래 전에 디자인이 바뀐 과자 봉지가 널려 있었다. 전국 어디서나 휴대전화가 걸린다지만 여기선 통신사 3곳 중 1곳(KT)만 서비스가 됐다.

  중국의 불법 어업을 감시하는 1500t급 군함이 서쪽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격렬비열도 부근에선 서해상에서 일어나는 중국 불법 어업의 60% 이상이 발생한다. 2012년 격렬비열도 앞바다에서 적발된 불법 어선만 1685척에 달한다. 이날은 대형 군함이 와 있어 중국의 불법 어선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중은 96년 협상을 시작한 이래 18년째 배타적경제수역(EEZ)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한·중 해협의 폭은 400해리(740.8㎞)가 안 된다. 그런데도 각자 200해리(370.4㎞)의 EEZ를 주장하고 있어 겹치는 부분이 생긴다. 중국의 주장대로 EEZ가 확정되면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침범하게 된다. 이 때문에 양국은 중간지역을 잠정조치수역으로 두고 공동어업을 하고 있지만 중국 어선은 호시탐탐 영해를 침범한다.

 320함의 상병용 함장(경감)은 “해역을 3개로 나눠 해경과 군이 지키고 있지만 해선만으론 한계가 있다”며 “격렬비열도가 유인화돼 감시 업무를 하면 영토수호 측면에서 전초기지로서의 의미가 생긴다”고 말했다.

 올해 국회가 배정한 15억원으로 숙소와 시설을 정비하고 헬기장을 건설할 예정이다. 인력은 3명이 배치된다.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해경 대신 해양수산부 인력을 파견키로 했다. 이들은 등대 관리 등 인근 해역 감시를 비롯해 무인 시스템으로 가동 중인 기상관측 업무 등도 겸하게 된다.

 백령도와 흑산도, 격렬비열도를 잇는 ‘황사 관측벨트’가 생긴다는 의미다. 정확한 황사 관측을 위해선 상공에 풍선을 이용한 관측기를 올려야 한다. 무인도에선 불가능하다. 허삼영 대산지방해양항만청장은 “격렬비열도에서 관측된 황사는 3시간 안에 수도권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유인도가 되면 관측의 정확성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곤 이렇게 덧붙였다. “서해권을 통과하는 거의 모든 선박이 격렬비열도 앞을 지나기 때문에 격렬비열도의 유인화는 대한민국의 관문을 스스로 지킨다는 의미가 있다.”

 취재를 마치고 다시 소형정에 올랐다. 국토의 끝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매서웠다. 점점 무인도가 멀어져 갔다. 그러나 몇 개월 뒤면 유인도다. 격렬비열도가 다시 태어난다.

격렬비열도=강태화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사진설명

격렬비열도(格列飛列島)는 큰 섬 3개와 부속도서 9개가 늘어서 있는 모습이 새가 열을 지어 나는 형태와 비슷해 붙여진 이름이다. 북격렬비도(오른쪽 위)와 동격렬비도(오른쪽 아래), 서격렬비도(왼쪽)가 ‘V’자 대형을 이룬다. 대한민국 최서단에 위치해 서해의 독도라고도 불린다.

서해 격렬비열도를 가다
[설 밥상, 이 얘기 어때요] 영해 주권
새가 열지어 나는 모습의 무인도, 무인등대만 남고 접안시설 없어
중국과 외교적 마찰 번질까 우려 … 해경 대신 공무원 3명 보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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