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남자는 역할로써 존재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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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형경
소설가

명절을 앞두고 간혹 발생하는 범죄가 있다. 귀향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절도·강도 등이다. 귀향 비용이란 단순히 왕복 교통비가 아닐 것이다. 명절을 쇠기 위한 비용, 부모님께 드릴 선물, 고향 어른들에게 객지에서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드러내 보일 인사 비용까지 포함될 것이다. 저런 범죄를 볼 때면 의아한 생각이 들곤 했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고향에 가야 하는 걸까. 그것은 내가 남자들의 책임감이나 역할 떠맡기에 대해 모르던 시절 생각이었다.

 남자들은 특정한 역할을 함으로써 존재를 입증하고 관계를 맺는다. 아들 역할, 가장 역할이 아니라면 친밀한 대상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심지어 남자들은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을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남자들의 역할 떠맡기는 그 뿌리가 깊다. 어린 시절부터 남자들은 부모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려고 한다. 가족을 구원하는 작은 영웅이 되고자 하고, 부모를 즐겁게 하는 마스코트 역할을 자처하기도 한다. 부재하거나 무심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엄마의 남편 역할을 떠맡는 아이도 있다. 부모의 요구를 예민하게 알아차려 가족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나름의 역할을 맡는다.

 역할로써 관계 맺는 방식은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 사용된다. 직장에서는 근로자 역할, 가정에서는 아버지와 남편 역할을 한다. 명절에 귀향하면 아들 역할을 하고 고향 친구라도 만나면 우정 넘치는 친구 역할도 해낸다. 그 역할들을 헛갈리지 않고 잘 해내는 것을 유능하다고 믿으며, 심지어 그 역할들을 자기 자신이라 여기는 오류도 범한다. 한 남자는 연애 시절에 파트너 여성이 “가난한 남자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강조하는 말을 들었다. 결혼 후 그는 아내 소원대로 부자 남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결국 회사 돈에 손을 댔고 공금 횡령죄로 감옥에 갔다. 현실감 없는 얘기지만 외국 심리학 책에서 읽은 내용이다. 심지어 어떤 남자들은 책임감이 무거운 나머지 허물처럼 벗어놓고 달아난다.

 또 하나 믿어지지 않는 사실은 남편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해내는 역할을 아내는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일 뿐 사랑과는 별개라고 계산하면서 늘 마음이 허전하다고 한탄한다. 그래도 요즈음은 명절을 앞둔 범죄나, 남자들이 과도하게 책임을 떠맡으려는 현상이 줄어드는 듯 보인다. 남녀가 동등하게 공존하는 길로 나아가는 흐름처럼 보여 혼자 안도감을 느낀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