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축구 20년] 12개팀 뛰는 화려한 '성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3면

한국 프로축구가 올해로 20돌을 맞았다. 1983년 아마추어팀을 끼워 넣어 5개 팀으로 급조해 출발한 프로축구는 20개 성상(星霜)을 거치면서 12개 프로팀으로 늘었고, 연 3백만명 가까운 관중이 찾는 인기 스포츠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수많은 스타를 배출하며 한국의 5회 연속 월드컵 진출과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밑거름 역할도 해냈다. 한국 프로축구 20년 역사의 흐름과 잊지 못할 명승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 플레이어를 3회에 걸쳐 되짚어 본다. 편집자

[글 싣는 순서]

① 프로축구 20년 변천사

② 명승부 명장면

③ 역대 득점왕 어디서 뭘하나

▶무늬만 프로

1983년 5월 8일 동대문운동장. '수퍼리그'라는 이름으로 한국 프로축구가 출범했다. 프로야구 출범 1년 만이었다. 그러나 말이 프로지 프로팀은 할렐루야와 유공(현 부천 SK)뿐이었고, 실업팀인 포항제철.대우.국민은행이 들러리를 섰다. 왜 프로축구 출범을 서둘렀을까. 명분은 한국 축구의 재건이었지만 내면에는 '정치'가 있었다. 80년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스포츠에 집착했다.

국민을 정치와 '격리'하는 도구로 스포츠가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대한축구협회가 대표팀이 출전하는 국제대회보다 수퍼리그에 집착한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다. 1억6천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상금도 이래서 내걸렸다.

▶양적 팽창

84년 현대.럭키금성(현 안양 LG).포항제철.대우 등 4개 팀이 프로에 합류했다. 프로 6개 팀에 아마추어 2개 팀이 가세해 풀리그를 벌였다. 원년의 폭발적인 관중에 고무된 축구협회는 개최 도시를 13개로 늘렸고, 승용차 30대 등 무려 3억5천만원 상당의 경품을 내놓았다.

▶선수가 최고

출범 초기의 혼란이 가라앉을 즈음, 선수들의 사기를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처음 도입된 방식은 스폰서를 정한 뒤 스폰서가 시상하는 골든볼.골든슈 등을 통해 선수들에게 상금을 부여하는 제도였다. 84년 5월 골든볼 수상자는 이용수(전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였다.

▶험난한 프로의 길

86년 리그부터 프로팀만 참가하는 '프로축구 선수권대회'를 신설하려 했지만 할렐루야의 반대로 막판에 무산됐다. 85년 수퍼리그는 외국인 최초로 득점왕에 오른 피아퐁(태국)과 박항서 등이 활약한 럭키금성이 우승했다.

▶진짜 프로는 87년부터

오직 프로팀만 참가한 첫 대회였다. 결과는 16승14무2패의 경이적인 성적을 거둔 호화멤버 대우의 우승이었다. '야생마' 김주성이 신인왕에 올랐다. '비운의 스타' 김종부가 대우와 현대의 스카우트전에 휘말려 희생되고, 이를 계기로 신인 선발을 위한 드래프트 제도가 생겼다.

프로리그의 중흥은 89년 일화의 창단이 기폭제가 됐다. 동대문운동장을 근거지로 한 일화는 박종환 감독이 이끌던 93~95년, 최초로 3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고정운.이상윤 등과 함께 3연패를 일궈낸 신태용은 지금도 팀의 맏형이다.

▶월드컵은 도약의 발판

90년대 중반 월드컵 유치 운동으로 프로축구는 본격적으로 뜨기 시작했다. 95년 전남 드래곤즈.전북 다이노스, 96년 수원 삼성이 창단돼 양적으로 급격히 팽창했다. 97년 대전 시티즌의 창단으로 마침내 10개 팀을 이뤘고, 96년부터 지역 연고를 정착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자기 팀'을 응원하는 서포터스가 생겨났다.

▶20주년

월드컵 4강 열기를 K-리그로 연결하려는 의도에서 대구FC가 창단되고, 상무가 K-리그에 합류했다. 그러나 외형만 키웠지, 과도한 승부욕과 일부 구단의 주먹구구식 운영, 프로축구연맹의 마케팅 능력 결핍 등 문제는 아직도 숙제로 남아 있다.

정영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