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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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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신동빈(59) 롯데그룹 회장과 이재혁(60) 롯데칠성음료 사장 등 롯데그룹 주요 계열사 사장들은 최근 ‘맥주 타임’을 열었다. 술자리였지만 얼굴이 불그레해지거나 여유롭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아니었다. 이들의 앞에는 각기 다른 맛의 맥주가 담긴 대여섯 잔이 놓였다. 이름은 ‘롯데 맥주’(가칭)로 같았다. 올 상반기 소비자들에게 선보일 대량생산 맥주를 어떤 맛으로 정할지 의논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롯데칠성 관계자는 “앞으로도 수차례 이런 자리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개발팀에서 수십 가지 맥주를 시험 생산하고 있다”고 전했다.

 OB맥주와 하이트진로가 양분해 온 국내산 맥주시장에 롯데가 올봄 도전장을 던진다. 4조원 규모의 시장에 ‘3국지’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특히 맥주 특수기로 불리는 6월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있어 회사마다 회심의 승부수를 던질 가능성이 높다.

 ◆2강 구도 깨지나=롯데칠성은 충북 충주에 2012년부터 1800억원을 투자해 연간 생산량 5만kL 규모의 맥주공장을 지난해 말 완공했다. 공장이 풀가동되더라도 국내 맥주시장 점유율 2.7% 정도만 생산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롯데칠성 관계자는 “반응을 살펴 충주산업단지에 7000억원을 더 투자해 공장을 더 지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공장까지 지어진다면 롯데칠성은 연간 50만kL를 제조할 수 있다. 국내 시장점유율을 22%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수준이다. 심은주 하나대투증권 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4월 롯데칠성이 맥주시장에 진출하면서 2강 구도가 더 흔들릴 수 있다”며 “기존 소주 사업을 바탕으로 한 영업 노하우와 풍부한 유통 역량을 갖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고 전망했다.

 심 연구원의 분석처럼 롯데칠성의 최대 강점은 유통망이다. 소주 ‘처음처럼’은 물론 생수, 각종 음료까지 전국 각지에 폭넓게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자금력 또한 만만치 않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인 CEO스코어에 따르면 지난해 6월 말 기준 롯데칠성음료의 사내유보율(기업이 자체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자금량 지표)은 2만9151%에 달한다. 이는 10대 그룹 상장 계열사 평균치인 1668%에 비해서도 17배가 넘는 규모다. 현금성 자산도 1338억원으로 넉넉하다. 한국희 우리리서치 연구위원은 “롯데의 진출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경쟁사가 하나 더 가세함으로써 다이내믹한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무엇보다 롯데칠성이 내놓을 맥주의 맛에 대한 기대가 크다. 롯데칠성은 지분 85%를 가지고 롯데아사히주류를 경영하며 일본산 맥주를 수입 판매하고 있다. 이 때문에 롯데칠성이 충주공장에서 생산하는 맥주에는 롯데아사히의 기술력이 담긴 것으로 전해진다. 이재혁 대표는 “현재 유통하고 있는 롯데아사히맥주는 프리미엄급 맥주라인이며 향후 출시할 ‘롯데맥주’(가칭)는 대중적인 라인으로 판매전략을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롯데가 프리미엄 맥주와 일반 맥주의 중간급 수준의 제품을 내놓을 것으로 전망한다. 롯데칠성 관계자는 “OB맥주의 카스나 하이트진로의 하이트와 비슷한 제품은 아닐 것”이라고 귀띔했다.

 ◆절치부심(切齒腐心)이냐 수성(守成)이냐=도전해 오는 롯데칠성 못지않게 OB맥주와 하이트진로 또한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있다. 박문덕(64) 하이트진로 회장은 최근 직원들에게 “분노하는 병사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목숨 걸고 싸우는 병사를 당할 상대는 없다”는 결연한 문구를 e메일로 보냈다. 이영목 하이트진로 상무는 “최근 몇 년 사이 OB맥주에 내줬던 업계 1위 자리를 다시 되찾자는 의미”라고 전했다. 국내 맥주는 1933년 일본계 조선맥주와 쇼화기린맥주사를 시작으로 양강 구도를 형성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맥주와(현 하이트진로) 동양맥주(현 OB맥주)가 그 맥을 이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특히 하이트진로(2011년 합병 전 하이트맥주)는 2000년대 들어 천연암반수 맥주 ‘하이트’를 앞세워 점유율 1위에 올랐다. 한데 2012년 ‘카스’를 앞세운 OB맥주에 역전당했고 지난해에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 상무는 “올해는 반드시 2012년 이전의 저력을 살려 1위를 탈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더해 직장인들의 회식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폭탄주 조합인 ‘카스처럼’(카스와 처음처럼) 마케팅이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소식도 하이트진로에 힘을 더해 주고 있다.

롯데칠성 관계자도 “롯데 브랜드를 단 맥주가 나오는 만큼 카스의 판매를 부추기는 카스처럼 마케팅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다”고 전했다. 롯데칠성은 이미 롯데맥주 마케팅팀을 꾸리고 사전 작업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 틈을 활용해 하이트진로는 자사 소주인 ‘참이슬’과 맥주 ‘드라이피니시d’의 조합인 ‘디슬이’ 마케팅을 강화할 방침이다. 이미 폭탄주용 잔인 디슬이잔을 식당가에 뿌렸다.

 OB맥주에도 결코 1위를 내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현재 최대주주인 미국계 사모펀드 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KKR)가 매각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KKR은 벨기에에 본사를 둔 AB인베브와 논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AB인베브는 2001년 오비맥주를 인수했으나 2009년에 사모펀드인 KKR 등에 매각했다. 현재 OB맥주의 자산가치는 5조원 정도로 평가되고 있다. 이 가치를 지키거나 높이기 위한 공격적 마케팅이 예상된다. 김윤오 신영리서치 선임연구원은 “롯데칠성에서 OB맥주를 인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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