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롄더, 황제 허락 얻어 페스트 환자 시신 소각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57호 29면

동3성(東三省) 방질총의관(防疾總醫官) 시절의 우롄더가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연구하는 모습. 1911년 2월 하얼빈. [사진 김명호]

20세기 초반, 재해가 산둥(山東)과 허베이(河北) 일대를 덮쳤다. 이재민들은 먹고살 길을 찾기 위해 고향을 뒤로했다. 산해관을 넘거나 발해만을 건너 비옥한 만주땅을 밟았다. 이들은 겨울만 되면 사냥도구를 들고 원시림을 헤맸다. 병들어 눈멀고 실성한 마르모트를 닥치는 대로 포살했다. 설수(雪水)로 마른 목을 축이고 해가 지면 모닥불 앞에서 마르모트의 가죽을 벗겼다. 세상에 이런 신천지가 없었다. 눈이 유난히 예쁜 이 야생동물은 자신을 괴롭히던 악성 병균을 포살자들에게 선사하고 죽어갔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56>

만주 일대에 창궐한 페스트가 쥐벼룩이 아닌 마르모트 사냥꾼을 통해 전파된 폐 페스트라는 우롄더의 주장은 의학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중국에 와 있던 서양인 의사들은 우롄더의 이론을 반박했다. “전염병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다. 페스트는 공기를 통해 전염되지 않는다.”

베이징과 톈진에 감염자가 발생하자 청나라 조정은 의사와 간호사를 대상으로 자원 봉사자를 모집했다. 동북에 가겠다는 한의사와 의대생들이 줄을 이었다. 톈진에 와 있던 프랑스 출신 페스트 전문가 매시니도 자원했다. 홍콩과 인도에서 페스트 방역 경험이 있는, 우롄더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동북에 온 매시니는 우롄더의 판단을 무시했다. “쥐를 소멸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환자는 격리시킬 필요 없다.” 우롄더가 주장을 굽히지 않자 매시니는 발끈했다. 동3성(東三省) 총독을 찾아가 우롄더 대신 자신을 동3성 방질총의관(防疾總醫官)에 임명해 달라고 간청했다.

총독에게 거절당한 매시니는 “러시아인 밀집지역에 가서 평소 하던 식대로 하겠다”며 함께하자는 우롄더의 손길을 뿌리쳤다. 벽안(碧眼)의 옛 친구에게 “가면 죽는다, 제발 가지 말라”고 말려도 듣지 않았다. 그날 밤 우롄더는 베이징의 스자오지(施肇基·시조기)에게 사직을 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방질총의관에 매시니를 임명하자고 건의했다. 스자오지는 우롄더에게 최대의 신임과 지지를 표하는 전문을 발송했다. “매시니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계속 방역을 진행해라.” 열흘 후 매시니는 하얼빈의 러시아인 거주지역에 있는 러시아 철도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폐 페스트였다. 매시니의 죽음은 폐 페스트 방역의 전환점이 됐다.

우롄더가 설치한 임시 격리수용소. 1911년 창춘(長春).

우롄더에게 회의를 품던 사람들도 복종하기 시작했다. 격리, 소독, 교통 차단을 아무리 해도 감염자는 점점 늘어났다. 우롄더는 사망자 처리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성(城) 북쪽에 있는 공동묘지를 찾아갔다. 사람 키를 넘는 눈 위에 관목(棺木)과 시신이 널려 있었다. 끝이 안 보일 정도였다. 우롄더는 경악했다. 일기에 “악성 병균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시신에 접촉한 동물들이 성안에 들어와 사람들에게 전염시키면 막을 방법이 없다. 곧 설날이 다가온다. 우리 중국인들은 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고향에 안장하는 습관이 있다. 귀성길에 오른 사람들이 시신을 들고 만리장성을 넘기라도 하는 날에는 산둥과 허베이 산시(山西)성은 페스트의 천국으로 변한다”고 적었다.

하루빨리 시신을 안장하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하얼빈의 겨울은 평균 섭씨 영하 30도를 웃돌았다. 땅을 파려 해도 삽질이 불가능했다. 대지가 해동되기까지 기다리려면 환자가 몇 배로 증가할지 몰랐다. 당장 화장시키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부모와 조상의 유체를 존중하는 전통을 유지해 온 중국인들에게 화장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반대를 진정시킬 방법은 황제의 성지(聖旨) 외에는 없었다. 우롄더는 현지의 관원과 덕망 있기로 소문난 사람들을 모아놓고 방법을 설명했다. 의외로 다들 찬성했다.

시신 소각을 허락해 달라는 우롄더의 상소에 청나라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3일 후, 섭정왕 짜이펑은 서구문화를 받아들인 사람다운 결정을 내렸다. 외무부를 통해 지시를 내렸다.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중요하다. 우롄더의 청을 허락한다. 계획대로 진행해라.”

1911년, 선통(宣統) 3년 정월 초하루, 하얼빈의 문무 관원들은 새해를 맞을 틈도 없었다. 한 손에 휘발유 통을 들고 마스크를 칭칭 동여맨 채 2500여 구의 시신을 소각했다. 다음 날부터 감염자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동북 전역은 물론이고 러시아 측도 우롄더의 방법을 따라 했다.

3월 1일 밤 12시, 하얼빈시 방역국은 중국인 거주지역의 페스트 사망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우롄더에게 보고했다. 도시마다 첩보가 잇달았다.

1919년 하얼빈에서 콜레라가 발생했을 때도 우롄더는 환자 2000여 명의 생명을 구했다. 1937년, 말레이시아로 돌아온 우롄더는 벽촌에 작은 병원을 차리고 화교들의 열대병을 치료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