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제4화 융마소의 명도공 14대 심수관씨(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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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1장 자랑스런「귀화인」의 후예들>
『7년 전 고향 한국에 갔던 인상은 지금도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생동하는 모습, 그리고 근대화를 향해 탈바꿈하려는 노력이 눈앞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14대 심수관씨는 언변이 아주 좋았다. 서글서글한 표정에「유머」를 섞어 가면서 내뿜는 언변은 여간 구수하지 않다. 『요즘은 모 정당에서 나보고 현 지사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습니다. 도자기 굽는 나보고 정치에 나서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3백70년 동안 망향을 달래기에 주름살을 펴지 못했던 한국의 후예가 현지사가 된다면 말입니다. 나보고 정치에 나서라고 권한 사람은 현재의 인물들로는 유권자에게 참신한「이미지」를 심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도자기를 구워 그 미를 나타내듯 정치도 내 손으로 잘 주무를 수 있으리라 보는 모양이지요? 허, 허, 허.』
심수관씨는 통쾌하게 웃었다. 웃음소리도 막힘이 없었다. 얼굴 전체가 웃으면서 온 몸으로 퍼져 나갔다.

<현 지사 출마 권유받아>
『또 하나, 나보고 정치를 해보라고 권하는 사람은 내가 현재「사쓰마」에 남아있는 사람 중에 가장「사쓰마」인다운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사쓰마」는 우직하고 강직한 무골의 나라였습니다. 「사쓰마」인의 기질이라면 굽힐 줄 모르는 고집과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꾸밈없는 고지식한 인간을 말합니다. 한국인의 후예가 오늘날「사쓰마」인의 기질을 가장 대표하는 인물로 지적된다는 것은 재미있지 않습니까?』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때문일까? 심수관씨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에도 조금도 주저 없이 이런 얘기를 털어놓는다. 오히려 그러한 태도가 자기자랑 같지 않고 소박해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는 참으로 아슬아슬 하면서도 기가 막히게 통쾌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서울대에서 젊은 학생들을 앞세우고 강연을 했을 때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내 심정을 그대로 알아준 그 젊은이들이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한국을 방문한 심수관씨는 서울대 강당에서 강연을 했다.
심수관씨는 강연 끝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 팔팔한 젊은 후배들에게 남겨 주고 싶었다.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게 좋을지 어떨지…』
「사쓰마」인의 기질을 대표하는 심수관씨도 말머리를 흐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저는 한국학생 여러분에게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 와서 한국의 내일을 짊어지고 나아갈 여러 젊은이들을 만났습니다. 누구나 젊은이들은 입을 모아 36년간 일본의 압제에 대해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한 일이고 도 그래야 하겠지요. 그러나 다시 한번 냉정히 앞을 바라보는 것이 어떨까요? 한국은 여러분들처럼 젊습니다. 마땅하고 당연한 일을 자주 이야기하기 좋다고 말하고 난 다음의 심정은 과거에 얽매는 것이 아닙니까? 새로운 국가는 내일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은 36년간이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저는 3백70년간을 어떻게 살았는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서울대생 노래로 화답>
심수관씨의 목소리도 어느덧 목메어 있었다. 가슴이 막히며 답답해지자 그는 보통 때처럼 농담이라도 던져 이 침통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적당한 농담이 이때 따라 떠오르지를 않았다.
바로 그 무렵. 납덩어리모양 가라앉았던 강당 안에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노래는 그 당시 한국에서 한창 유행을 하고 있던『노란「셔츠」입은 사나이』였다. 심씨도 한국에 와서 몇 번인가 들은 일이 있어 그 노래를 알고 있었다.
학생들은 박수대신 심씨의 착잡한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는다는 듯 노래로 화답해 준 것이다.
『그때의 감격은 지금도 온몸이 찌르르합니다. 이 몸집 큰사람의 눈에 핑그르르 눈물이 괴면서 안경이 뿌옇게 흐려지더군요. 농담 잘하는 나도 멍하니 서 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말이 설명이 필요 없었지요.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이런 때가 아니겠습니까?』
이야기하는 심수관씨의 표정은 아직도 감격에 젖어 있었다.
『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지요. 그것은 박대통령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일본 대사관을 통해 박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청을 했습니다. 이 청을 넣었을 때만 해도 일본 땅 이역에서 망향을 달래 온 까마득한 후예가 고향에 돌아와 무모한 용기를 부린 것이지요. 이 청을 받은 일본대사관에서도 무리라고 말했으니까요. 그러나 서류를 내어놓고 기다리던 어느 날 연락이 왔습니다. 박대통령이 만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청와대로 들어가 박대통령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날 저녁 박대통령은 막걸리를 저와 함께 마셨습니다. 헤어질 때 대통령은 저의 어깨를 두드리며 술을 잘하는 것 같은데 나쁜 술엔 조심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마치 형님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박대통령 격려에 감명>
임란 때의 한 불모의 후예가 고향을 찾아와 대통령을 만난 이 추억은 색다른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나는 일본에서 북한이 어쩌고 어쩌고 하지만 대한민국 편입니다. 박대통령의 구수한 인상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심씨는 곧 그의 화술대로 농담으로 분위기를 돌렸다.
이렇게 솔직하고, 이렇게 명확히 자기 기호를 털어놓는 사람도 많지는 않으리라. 이게 바로「사쓰마」인의 기질이란 것일까 생각되었다.
『한국에서 저는 진지한 제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보고 한국에 와서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심수관가의 도자기 예술은 본래 한국의 것이었으니까, 3백70년 후인 오늘 독립된 한국에 그 기술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진지한 권유는 저의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합리적이고 고향을 잊지 못해 하는 모순을 한줌의 구름처럼 떨어버릴 수 있는 유혹이기도 했습니다.
저에게 제의한 그분은 새 삶의 터를 한국에 새로 마련, 생활보장은 물론 도자기예술을 빛나도록 후원해 줄 것을 약속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마디로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일본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사쓰마야끼」의 원조는 물론 한국이고 한국인의 손으로 그 빛을 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의「사쓰마야끼」의 미는 3백70년을 흐르는 동안 이제는 한국의 미가 아니라 일본의 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예 미, 풍토 따라 변모>
기술의 원조는 비록 한국이지만 일본 땅에서 일본의 분위기에 맞추어 다듬어지는 동안 그것은 완전히 일본 것으로 탈바꿈하고 만 것입니다. 아무리 기술 좋은 내가 한국에 가서 도자기 일을 계속한다고 해도 한국의 미를 창조해 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한국에 이제 돌아간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한국 것도 아니고 일본 것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빛을 내고 있는「나에시로까와」의「사쓰마야끼」는 한국에 상륙하자마자 그 빛을 완전히 잃고 말 것입니다. 더구나 내가 가서 도자기를 굽는다면 한국의 도자기는 어떻게 될까요?
한국의 고유한 미를 잃고 한국 것도 아니고 일본 것도 아닌 얼치기가 될 것이 아닙니까? 도자기의 미는 그 나라 그 풍토, 그리고 그 인심에서 창조되는 것입니다.
「나에시로까와」의 도자기는 이제 일본사람의 기호에 알맞기 때문에 그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머나먼 선조의 고향을 잊지 못하는 모순에 빠지면서도 나는 어디까지나 일본인으로 일본의 미를 창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심수관씨도 침이 말라 오는 듯 차를 마셨다. 안타까운 심경으로 도자기의 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 듯했다.
『나의 이러한 간곡한 이야기를 듣자 진지한 제의를 꺼내 왔던 분들도 납득을 하더군요. 결국 불모의 후예는 불모의 후예로 남아 있어야 그 존재가치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기만 하면서 말입니다. 하하하』심수관씨는 낙천적으로 웃어 젖혔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공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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