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인범 씨를 애도함|유한철<음악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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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달 밝은 가을밤에 산들바람 분다. 아! 너도 가면 이 마음 어이해』하고 부르던 형의 애창이 겨레들 귓전에 쟁쟁한데 형은 한국이 낳은 서정 명가수의 칭호를 안고 노래에 살던 60인생의 막을 내렸단 말이오? 형과 내가 중앙악단에 첫선을 보인 것은 1932년6월11일 한국최초의 음악「콩쿠프」인 제1회 전조선 남녀중등학교 현상음악대회였었소. 그때 숭실중 5년생인 형은「구노」의『꽃과 별』로 투명한 음색, 음질을 자랑했고 다음 해에는 고 현제명 박사의 추천으로 음악과라는 별명을 가진 연전문과에 진학했으며 나도「세브란스」의전에 들어가 형과 재회를 이루게 된 것이었소.
제1회 조선일보 음악「콩쿠르」에 수석이었던 형은 학생의 몸으로 기성음악인들과 실력으로 어깨를 겨루었고 형이「리드」하던 연전 4중창단은 젊은 음악예술인의 동경과 이상이었소. 연전을 마친 다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고등음악학교에서 명「테너」오전량삼에게서 기를 닦아 단숨에 39년11월 제8회 전 일본음악「콩쿠르」성악부문에서 1위없는 2위를 차지해 어둠 속에 사는 백의민족에게 마음의 불을 밝혀줬었소.
1위를 안준 일인도 어쩔 수 없는 듯 NHK대 태평양연안방송의 신인가수로 지명 받아 전파를 타고 나간 주옥같은 형의 이태리 가곡모음은 우리들에게 마음의 양식이 되었었소. 며칠 안 되는 휴가로 서울에 돌아온 어느 겨울날 와사등 비치는 소공동 거리를 어깨동무하고 거닐며 그간의「히트」가곡들을 나지막히 불러주던 따사로운 형의 우정이 영영 잊혀지지 않소.
그때 나는 일본「리사이틀」「프로그램」에서「피아노」반주 이정자라는 이름을 처음 보았고 그이가 바로 신호여학원을 나온「피아니스트」로 형이 영원한 반려자로 삼은 분이라는 것을 알았었소. 아마 이분이 아니었더라면 형은 훗날 빈사에서 다시 살아날 수 없었을 것이오.
만주벌판 쫓기다 운 좋게 돌아온 형은 해방된 한국에서 올바른 우리 노래가 무엇인지를 들려 보여줬고 대망의 서울대 음대교수가 되어 음악가로의 찬란한 이정표를 세웠었소.
소공동 뒷골목 비록 찌부러진 목조적산 가옥이지만 부인의 숙명여고 수입을 합쳐 제법 「피아노」까지 사들이고 형은 성악예술에의 정열을 불태웠었소..
밤마다 얼큰한 기분으로 형 집을 찾아가『야, 인범아!「고향생각」한번 뽑아!』하고 고함치던 나 자신, 그리고 얼굴에 둥근 복점하나 믿고 교육자로 대성한다던 윤경섭(현 보인학원 이사장), 수박 깊이 파먹기 대회에 나간다던 38따라지 숭실 동창인 뻐드렁니 검사 김병화 (현 법원 행정처장)도 2층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청아한 형의 목소리에는 그만 야간침입의 만용을 뉘우쳤었소.
저 6·25 남침의「무서운 시련 속에서도, 그리고 제자 집 바깥방 피난살이에서 당한 중화상에서도 기어이 무대 위에 되살아났던 형이 이렇듯 가다니 내가 싸늘한 시신을 확인하고도 정말 믿어지지 않는구려!
형만이 옛 가지에 버림받은 낙엽처럼 가야 하나요? 정녕 형만이 노래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등지고 마는 건가요?
이제 근섭·방숙·방섭 예능 2세가 이미 대를 이었고 언제나 형이 부르는 무대 뒤에서『하느님, 그에게 용기와 믿음을 주소서!』하고 기도하던 부인이 영원히 후회 않는 형과의 사랑을 믿으며 형이 못 다한 음악의 꽃을 활짝 피워갈 것이오.
「아디오스」, 편안히 잘 자오. 고마웠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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