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휴전회담(후반부)(1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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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반공포로 석방>(11)
육지로 분리돼 나온 반공포로수용소에는 프로들의 석방탄원 혈서가 집더미처럼 쌓였고 그 보관소 근처는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대한반공청년단은 우익포로들이 52년 봄 거제도에서 부산·광주·논산·대구·마산 등지로 분산 수용된 후 잠시 그 조직이 와해위기에 처했었으나 불굴의 투지와 국군헌병들의 도움으로 다시 궐기하여 석방운동에 마지막 「피치」를 올렸다.
반공포로들은 육지로 격리되면서 공산포로라는 목전의 투쟁대상 하나를 잃게 된데다가 종횡의 조직연락이 두절, 석방투쟁에 행동통일을 기하지 못한채 그동안의 「반공」논공행상을 둘러싸고 자체내분도 겪었지만 단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국군헌병을 「메신저」로 한 비상연락망을 수립, 조직을 재정비하고 투쟁을 다시 전개하였다.
대한반공청년은 국군을 통해 단원증을 밖에서 인쇄해 들여와 각 수용소 포로들에게 나누어줘 단원들에게 신분을 보장(?)해주고 석방투쟁에 사기를 드높여줬다.

<헌병으로 위장…007식 탈출>
마침내 이관순단장은 52년11월 헌병으로 위장하고 수용소를 탈출, 관계요로를 직접 방문하면서 석방운동을 벌였다.
마치 007수법을 방불케 하는 반공청년단의 제3단계 석방운동은 불법 탈출한 단장이 국회국방분과위원회에까지 참석하여 비밀증언을 하는 등 최후의 안간힘을 기울였다.
국군헌병들은 미군관계나 군법을 따지기에 앞서 이러한 반공포로들의 최후의 몸부림을 적극 지원했다.
반공포로들의 송환거부 호소가 수용소를 탈출한 그들 대표에 의해 직접 대한민국정부 요로에 메아리지자 깊은 동정과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고위층에도 그 뜻이 올바르게 전달돼 이승만대통령의 석방결심을 촉구하게 되었다.
정부는 그동안 비밀리에 접수한 반공청년단의 온갖 단원서류자료와 수집한 정보뿐아니라 직접 사람을 통해 포로들의 잔류 결의도를 정확히 측정, 휴전조인을 향해 줄달음질치는 정세에 실기치않고 「6·18」을 석방「D데이」로 택했다.
한편 미군당국은 반·친공 포로의 분리수용을 전후해서부터 사후약방문격이었으나 사회학교수들로 구성된 연구「팀」을 내한시켜 포로들의 사상대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68년까지 기밀로 돼있던 한국전쟁포로에 대한 이 같은 연구보고는 월남전쟁의 공산포로취급에 많이 원용됐다고 한다.
그러면 반공포로들의 마지막 석방투쟁담을 당시 관계자들로부터 들어보겠다.
▲이관순씨(당시 대한반공청년단장·현 서울거주·상업·50) <육지로 분산 수용된 우리 반공포로들은 일부에서 거제도 당시의 「반공」업적을 내세워 여단장·감찰대장 등을 서로 맡으려는 감투싸움을 벌이기도 했어요.
나와 단중앙당본부가 서류일체를 모두 가지고 부산가야수용소로 이동한 후 애를 태우면서 조직의 기능회복을 위한 몸부림을 치던 중 헌병대의 이주하 이정표중사가 김선호 중위를 뒤이은 우리 반공포로들의 제2의 구원자로 나타났읍니다.
나는 이들을 붙들고 대통령비서로부터 온 답장을 보여주며 지원을 애소했어요.
이주하 중사가 서병숙 헌병대장(현 「앰배서더·호텔」회장)의 묵인아래 쾌히 응락하자 우리들은 보급 받은 담배·비누 등을 내다 팔아 자체자금을 조달, 단원증을 인쇄해들여 광주·논산 등지의 각 수용소로 보내는 등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다시 석방운동을 계속해 나갔읍니다.
또 이 중사를 통해 전단을 만들어 들여 작업 나가는 차 중에서 시내에다 뿌리기도 했어요.
52년11월부터는 미군들의 포로관리가 엄격해졌고, 그에 비례해 반공포로들의 석방투쟁도 격렬해졌읍니다.
그래서 52년11월15일 밤 나는 목숨을 걸고 이주하 중사의 도움을 받아 교묘히 수용소를 탈출, 정부요로를 직접 찾아다니며 석방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우선 이미 작업장에서 탈출시킨 반공포로동지의 매부집인 영도 장인수집에 거처를 정한 후 이석영이라는 가명으로 나서 반공애국연맹이사장 이윤영씨한테 소개받은 김병연(고인) 평남지사로부터 피란민중 한 장을 얻어놓고 국회·국방부 등을 쫓아다니며 애끊는 호소작전을 폈읍니다.
한때는 기진맥진 한데다가 돈까지 떨어져 영도다리 위에서 몇 번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지만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새벽같이 영도에서 대신동까지 걸어가 높은 사람들을 어렵게 면회하면서 끈질기게 버텨나갔어요.
국방부에 들어가 몇 고관을 만나 호소를 했으나 별로 탐탁한 반응이 없어 그 다음에는 국회사무처에 근무하는 고향사람 이영각씨를 통해 국방분과위원장 임흥순 의원에게 선을 댔어요.
53년5월 하순, 임 의원은 경남도청에서 비공개 국회국방분과위원회를 개최, 나를 불러 증언을 청취합디다. 나는 2시간에 걸친 열변으로 반공청년단의 조직, 우리 나름대로 생각하고 석방방법 등을 자세히 설명했어요.
임 의원은 ①강제송환이 된다면 반공포로들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이며 ②탈출에서의 자신할 수 있는 성공률은 얼마나 되는가 등을 묻데요.
탈출은 국군이 발사만 안하면 80% 이상 성공할 수 있고 강제송환시에는 싣고 가는 차 중에서 모두 뛰어내릴 각오들이라고 대답했어요.
임의원은 나의 비밀증언들이 곧 경무대에 보고될 것이라면서 사무직원에게 내 연락처를 적어놓게한 후 회의를 끝내더군요.

<전단도 작업중 시내에 뿌려>
이보다 앞서 53년2월 가야수용소의 포로들이 뿌린 석방촉진 「비라」가 신문에 보도돼 반공통일연맹의 안호상 위원과 선전부 이몽 송원영씨(현 신민당국회의원) 등이 비밀리에 국군헌병대까지 들어가 반공청년단간부들을 불러 표창장과 자금을 주고 격려해준 일도 있었읍니다.>
▲이주하씨(당시 가야수용소제1헌병중대 조사계선임하사=중사·현 서울거주·45) <나는 반공청년단을 돕기로 결심, 미군들의 눈을 피해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가 포로들의 사진을 찍어 부산시내 인쇄소에서 단원증을 만들어다 줬읍니다.
사실 복장만 육군헌병이었지 근무로 볼 때는 반공청년단의 석방운동에 전념하는 포로의 한 사람이나 다름없었어요.
한 달에도 몇 번씩 출장명목으로 광주·논산수용소등을 돌며 반공청년단의 단원중이나 연락문서를 한국군경비병들을 통해 넣어주는게 당시의 내 임무(?)였으니까요.
또 가야수용소의 우리 헌병대는 작업중 탈출하는 포로를 눈감아준 일도 했고 미군수용소장을 설득, 철조망을 가운데 두고나마 포로들이 그 가족과 면회를 할 수 있게도 해줬어요.
하루는 이관순 단장이 쪽지를 주면서 조사과장 이석우(고인) 대위한테 전해달라길래 펴봤더니 나가서 좀 석방운동을 해볼 수 있도록 「탈출」을 시켜달라는 겁디다.
이대위가 중대장 서병숙소령한테 얘기하니까 공식으로 곤란하니 알아서 적당히 하라는 눈치예요.
그래서 내가 미군들이 많이 외출한 일요일 저녁때를 이용, 정복차림으로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 옷을 벗어줘 이 단장은 말끔한 헌병으로 유유히 걸어나갔어요.
이 대위한테 단장을 탈출시켰다고 보고했더니 따라나가서 신분보장이 확실히 될 때까지 붙잡히지 않도록 계속 돌봐주라는 거예요.

<헌병까지 포로의 연락병노릇>
이튿날 수용소는 발칵 뒤집혔고 이단장을 속히 잡아들이라는 미군수용소장의 불호령이 한·미헌병대에 떨어지면서 현상금까지 붙입디다.
나는 임흥순의원을 만나러가는 이단장을 데리고 가다가 길거리에서 공교롭게도 수용소안의 한국인 미군정보원과 마주쳤어요.
그가 이관순씨한테 당신 어디 있소 하면서 다가서길래 내가 증명을 내보이며 지금 붙잡아 가지고 가는 길이라고 가로막았어요.
그리고 나서 이단장의 금반지를 빼서 그 자에게 주면서 사정을 했더니 물러섭디다. 이렇게 해서 가슴이 섬뜩했던 위기일발의 극적인 순간을 가까스로 넘기기도 했어요.>

<나의 지원에 기대 이상의 성과>
▲김선호씨(당시 포로수용소 전범조사처연락장교=중위·현 미「미들·테네시」주립대교수·47·서면회견) <52년5월 거제도포로수용소장 「도트」장군 납치사건이 있은 후 미군당국은 「시카고」대학 사회학교수 등을 중심으로 한 포로문제 연구「팀」을 내한시켜 문제의 발단과 원인들을 규명키 시작합디다.
당시 포로들의 내부조직과 활동을 나만큼 아는 한국군 장교도 없던게 사실이지만 이 연구진은 나의 영문수기를 토대로 연구를 시작, 처음부터 끝까지 내자문과 보조를 받았어요.
이들의 연구보고는 68년까지 기밀로 돼있다가 다시 정리, 공개출판 됐는데 월남전 때 공산포로취급에 많은 참고가 됐다고 해요.
나는 부산수용소에서부터 반공포로들과 인연을 맺었는데 하옇든 반공청년단 조직이 단시일 안에 그렇게 확장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신기한 생각이 듭니다.
반공포로들이 미군들로부터는 도저히 구원의 힘을 얻을 수 없자 일개 국군중위인 나한테 의지한 것이었지만 나의 지원이 기대이상의 결과를 가져왔어요.>
▲최윤순씨(당시 논산포로수용소 반공포로·현 의정부거주·42) <우리 반공포로들은 육지로 분리 수용된 후에 머리에 「반공」이라고 쓴 띠를 매고 철조망 안에서 반공청년단가를 목이 터지게 부르며 석방촉진 「데모」를 벌였읍니다.
석방탄원 혈서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 집더미처럼 쌓였고 그 보관소근처는 피비린내가 코를 찔러 접근을 못할 지경이었어요. 나는 당시 논산수용소에서 거의 매일같이 동지들과 이 같은 석방투쟁을 벌이다가 6·18에 무사히 탈출했읍니다.>
◆주요일지(1953년4월17일∼20일)
※17일 ▲쌍방연락장교 19일 회합에 합의 ▲이시영 전 부통령 별세, 향년 85세 ▲「라오스」침입 호군, 불군과 격전 ▲북한, 7명의 억류미국인석방시사
※18일 ▲미군, 서부전선서 「포크촙」고지탈환 ▲미국, 「네바다」에서 금년 6회째의 원폭실험
※19일 ▲공산측, 한국휴전은 6월20일에 성립된다고 선전방송 ▲한국군2개사단 증설발표 ▲「클라크」「유엔」군사령관, 문산비래 ▲북한, 14명의 억류불인 석방
※20일 ▲상병포로교환개시 ▲「처칠」수상, 한국휴전성립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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