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의병봉동가·유학자|수당 이남규의 사상과 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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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은 14일 하오3시 동교에서 한말의 의병연동가요 유학자인 수당 이남규선생의 『수당집』간행기념강연회를 가졌다. 이날 이가원박사(연세대)는 「수당의 사상과 문학」을, 홍이섭박사는 「수당과 홍주성전투」를 제목으로 수당의 인물과 사상을 설명했다. 다음은 그 강연 요지.
수당 이남규 (1855∼1907) 는 성호 이익, 성재 허전를 잇는 보학파의 인물이었으나 또 위정척사의 앞장선 성리학자였다.
19세기말 외국과의 접촉에 있어 그 대응의 자세에는 두가지가 있다. 외국문화를 받아들여 이를 모방하자는 개화파와 우리의 전통적체제를 유지하면서 외국의 세력을 배제하자는 위정척사파가 그것.
이들 가운데 어느것이 과연 우리 민족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 했던가는 역사가 판가름할 것이지만 개화파가 한일합방시대에 시류에따라 타협하는 태도를 보였던데 비해 위정척사론자들이 의병운동등을 통해 타협을 거부하고 장렬한 죽음을 택했던 점은 다시 평가돼야겠다.
그위정척사론자의 한사람이었던 수당의 면모는 오놀의 싯점에서 잊어버릴수 없는 것이라고 이우성교수는 설명했다.
그의 내인가운데 민족사가 신채고가 있는것도 주목할만 하다.
이가원교수는 수당의민족주체사상과 배일정신은 특히 소로들에서 빛난다고했다. 「청기왜소」「강토적소」는 대표적인것이다.
그밖에도 공주적중에서 읊은 시, 북벌의 의지와 배일의 결의를 다진 「삼전도탄」이 있다.
그들의 한 귀절『원컨대 앞장서 북벌로 연의땅을 밟고 동으로 일본을 무찌르고 돌아 우리 군주의 덕을 길이 새기리…』라는 것에서도 그의 뜻이 살아있다.
선비로서 한말과 같은 어려운 처지에 어떻게 처세해야할 것인가는 그의「답윤자삼서」에 나오는 산양처자전에서 설명되고있다.
또 애국련민의 뜻은 「영흥잡영19수」에도, 제조의정병세「문삼무영환문」에도 드러난다.
항동의 면에서 수당은 항일 의병의 선봉이었다.
이민족의 침략이 있을때 나라를 위하여 결사항쟁한 의병은 한국사에서 특히 19세기말 20세기초에 걸쳐 역사상 유례없는 전암층을 망라한것이었다고 홍이학교수는 지적했다.
일제의 식민지기구로서의 통감부가 서울에 설치되던 1906년 음력4월 충청도 홍주성에서 일어난 의병은 특히 가장 조직적이고 강력한 항쟁이었다는 점에서 기억될만한 싸움을 벌였다.
이 홍주성전투의 선봉장이 수당이었고 일군의 대대병력을 맞아싸운 의병이 8백여에 이르렀음을 역사에서 밝혀야한다는 것이다.
수당은 1907년 음8월19일 재기를 노리다 일병에 잡혀 온양 평촌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한국사를 연구하는 이는 이같은 의병의 정신을 오늘날 소홀히하고 있다고 홍박사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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