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금융시장] 上. "외환위기 다시오나"…불안감 확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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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시장과 주식시장이 연일 휘청거리면서 한국 경제 전체가 불안에 휩싸여 들고 있다. 이러다가 경제 전체가 어떻게 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1997년 외환위기 때를 연상하는 사람들도 많다.물론 6년전과 지금을 단순 비교하기는 무리다.

그러나 이미 외국인투자자들을 중심으로 위기의 싹이 보인다는 얘기도 나온다.위기의 금융시장을 긴급 점검한다. (편집자)

11일 정부는 김광림 재정경제부 차관 주재로 금융정책협의회를 열었다. 화두는 최근 요동치는 금융시장을 어떻게 안정시키느냐는 것이었다.

金차관은 "최근 원-달러 환율이 지나치게 급등하고 있기 때문에 외환시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며 "필요할 경우 적절한 대책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구두개입'을 넘어 '직접개입'에 나설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다. 시장이 그만큼 심상찮다는 얘기다.

외환코메르츠투신운용 이재현 운용본부장은 "북핵 문제가 불거지자 유럽계 투자자들이 투자 축소 움직임 등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며 "그러나 한국을 잘 아는 투자자들은 아직 관망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 '셀 코리아'가 본격화한 것은 아니더라도, '바이 코리아'는 완전히 멈춰섰다. 주가.환율이 요동치고, 외화를 빌리기 어려워 진 것은 물론 달러 사재기 조짐도 일부 나타나고 있다.

주가.환율 추이 '닮은 꼴'=지난해 말 750선이던 종합주가지수는 11일 532.53으로 석달새 2백포인트 넘게 떨어졌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1월엔 2억8천만달러어치의 주식을 사들였다가 2월 7억3천만달러어치를 팔아치웠고, 이달 들어서는 지난 7일까지 1억달러어치를 팔았다.

외환위기 때는 1997년 8월 750선이던 주가가 12월 27일 350선으로 주저앉아 넉달 만에 4백포인트가 떨어졌다. 외국인들은 8월 4천만달러를 시작으로 10월에는 7억8천만달러, 11월 7억3천만달러어치의 한국 주식을 팔았다. 규모와 속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외국인들의 움직임이 6년 전과 비슷하게 심상찮아진 것이다.

환율도 마찬가지다. 지난 1월 30일 1천1백70.1원이던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3월 들어 곧장 치솟아 지난 10일에는 1천2백38.5원으로 5개월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외환위기 때는 원화가치 폭락이 훨씬 심했다. 97년 10월 중순까지 9백10원선에서 움직이던 원화 환율은 10월 말부터 꾸준히 상승했다. 그러자 11월 5일 미국의 블룸버그통신은 서울발로 "한국의 금융위기는 태국보다 심각해질 가능성이 크다" 며 "한국이 국제통화기금 (IMF)에 긴급자금을 요청할지도 모른다" 고 타전했다.

이후 11월 17일(1천8.6원) 환율은 1천원선을 돌파한 후 12월 23일 1천9백62원으로 사상 최고치까지 멈춤 없이 치솟았다. 그러나 한국은행 조문기 외환시장팀장은 "외환위기가 태풍이라면 지금은 물결이 출렁대는 정도"라며 "북핵 문제가 잠잠해지면 시장은 금세 안정을 되찾을 것"으로 전망했다.

97년에 외환위기가 닥쳤던 것은 외환보유액이 고갈됐기 때문이지만 현재는 외환보유액이 1천2백40억달러나 돼 외환위기가 재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정한영 금융연구원 전문위원은 "외환위기 직전과 비교한다면 위기의 강도는 그때에 비해 70~80% 수준"이라며 "기초체력이 튼튼하고 외환보유액이 많다지만 투자위축이 심각하고 외국인 투자가 많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외화 빌리기 어려워졌다=97년 말 은행들은 외화를 한푼도 빌려오지 못했다. 심지어는 국가와 신용등급이 같은 산업은행마저 금리를 불문하고 달러를 구하지 못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요즘 은행이나 정부는 국제시장에서 '코리아 리스크'와 다시 마주치고 있다.

북핵 문제가 불거진 지난달부터 외국 돈을 빌리는 데 붙는 가산금리가 높아진 은행들은 자금조달을 미루거나 취소하고 있고, 정부는 역시 외국환평형기금채권 발행을 연기 중이다.

재경부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지난 98년 발행한 5년짜리 외평채 10억달러어치의 만기가 다음달 15일로 닥쳐왔지만 만기연장을 가능한 한 늦추기로 했다고 11일 밝혔다.

지난해 12월 말 1.23%포인트에 그쳤던 외평채 가산금리가 최근 1.75%포인트까지 급격히 치솟았기 때문이다.

재경부 관계자는 "외평채가격이 우리나라의 대외신인도를 매일 점검하는 지표로 사용되고 있는 만큼 차환발행에 나설 방침"이라며 "이라크전이나 북핵 문제 등을 고려해 시기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들도 마찬가지다. 오는 6월께 10억달러의 해외예탁증서를 발행할 계획이던 우리금융은 이를 당분간 연기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달러 사재기 조짐도=본격적인 달러 사재기는 아직 없지만 은행이나 증권사 창구엔 달러를 사두려는 고객들의 문의가 빗발친다. 우리은행 영업부 관계자는 "달러를 사두려는 문의가 평소 15건 정도에서 최근 30여건으로 급증했다"며 그러나 "아직은 문의 수준"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발빠른 투자자나 부유층들은 이미 달러 사냥에 나서고 있다.

메릴린치증권의 서충모 이사는 "아직 본격적으로 달러를 사재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든지 투기적 수요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정재.장세정.주정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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