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벽지 국민교 교장 김영옥씨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원대국민교 와현 분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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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어떠한 대가를 예상하지 않고 남을 돕는다는 일은 오늘날과 같은 각박한 시대에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만 그것이 남의 희생 위에서 또 남을 이용하기 위한 저의를 지니고 하는 일이 아니라면, 조그만 일이라도 서로 흐뭇함을 맛보기 위한「도움」은 값지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굳이 뼈를 깎는 희생적 봉사가 아니더라도 남을 도우며 사는 삶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찾으며 살아가는 여성들을 찾아본다.
강원도인제군인제면 원대국민교와현분교는 해발7백m 산촌에 화전민어린이들을 위해 세운 학교다. 개교3년 만에 도 지정 시범 교로 뽑힐 만큼 벽지학교로는 드물게 빨리 성장한 와현분교는 한 젊은 부부구사의 꿈을 심는 노력이 피어난 곳이다.
와현분교장은「버스」길에서 가파른 4km를 걸어 올라가야 하는 곳에 있다. 이 분교장을 지키고있는 교사 김영옥씨는 몇 집 안 되는 이곳 산 마을에선 학교 선생님 일뿐 아니라 동네 어머니같은 존재다.

<제일 먹고싶은 건 쌀밥>
남편 최명환씨도 똑같이 국민교 교사였기 때문에 함께 일할 수 있는 임지를 찾다가 『이왕이면 살림저축도 많이 할 수 있고 또 남들이 싫어하는 일을 함으로써 보람을 찾아보자』고 벽지학교를 선택했다. 이들은 67년3월 인제군 원대국민교에 자원하여 온 이래 5년 간 학교 밖의 일에 오히려 더 많은 힘을 써왔다는 것이다.
『몇년동안 고생해보자는 단단한 결심을 갖고 들어왔지만 막상 와서보니 상상밖의 일이 너무 많았어요. 학교선생님으로만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도저히 없었지요.』
면 직원도, 경찰서 순경도, 보건소직원도 아무도 한번 다녀가 본적이 없다는 벽지화전민 마을의 상상할 수조차 없는 비참한 생활을 직접 마주하게된 이들 부부는 69년3월 새로 문을 연 와현분교를 둘이서만 맡으면서부터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나서기 시작했다.
『외부세계와 전혀 접촉이 없는 탓으로 어린이들도 요즘 세상에선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준이었어요. 그들에게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 하나만이라도 가르치고 싶었어요.』
옆집이라야 험한 산을 넘어야 갈 수 있는 처지여서 옥수수와 감자·콩으로만 연명하는 40여 호 이 마을에선 자동차와 「버스」를 구경 못한 어린이가 절반이 넘는다. 더우기 그 자동차를 한 개인소유로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감히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통나무를 얽어 흙을 바른 움막 같은 집에서 선조 때부터 물러 받은 가난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의 어린이들은 장차 커서 「군인이 되고 싶은」「대통령이 되고 싶은」막연한 꿈마저 생각지 못한다.
『쇠고기나 과자를 먹고 싶으냐』고 물어도 반응이 없다. 『무엇이 제일 좋으냐』고 물으면 「쌀밥」이라고만 대답한다.
『전국의 어린이가 똑같이 펴드는 교과서는 이들에겐 전혀 실감나지 않는 것들뿐인 셈이지요.』「사회」와 「자연」을 가르치기가 민망했다고 김 교사는 말한다.

<전국40개 교와 자매결연>
『이런 환경의 어린이들에겐 무엇보다도 조그만 것이라도 희망을 갖게 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그래서 김 교사는 남편과 함께 흙바닥 교실을 넓고 번듯한 학교로 만들어 도시어린이들과 비슷한 환경을 만드는 일과 이들이 돈을 들이지 않고 학교 다닐 수 있게 하자고 앞으로의 목표를 세웠다는 것이다.
우선 부부 두 사람의 벽지 근부 수당을 떼어내 당시 48명의 학생들에게 책가방과 학용품을 사주었다. 통나무로 책상과 걸상을 만들고 학부형들을 찾았다. 험하게 경사진 땅을 정지해놓으면 교사를 지어주겠다는 교육청의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 가구 한 명씩 48명의 손을 빌어 학교를 지을 터를 닦는 일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김 교사는 남편과 밤을 새워가며 전국 도시의 1백 개 국민교에 편지를 썼다.
『도시의 잘사는 어린이들로부터 이들에게 꼭 도움이 와야한다고 믿었기 때문에』자매학교를 맺자는 내용을 띄웠다.
70년3월 40군데 학교에서 답장이 왔고 학용품과 옷·헌책·약품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이곳 어린이들이 전혀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될 만큼의 물건들이 모여들었고 이것은 곧 학부형들이 학교 일에 앞강서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3년 동안 와현분교는 교실2개의 학교건물과 넓은 운동장·도서실·놀이터·수도시설 등을 순전히 학부형들의 노력봉사로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교시설의 확장뿐만 아니라 김 교사는 학부형들의 어려운 생활에 더 많은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오랜 가난에다 외부로부터의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이들에게 김 교사는 우선 병을 치료할 제품을 구입해놓고 주사 놓는 일에서부터 응급치료 하는 일에 나셨다.
춘천간호고등학교에서 4O일간 양호강습도 받고 언제나 무료로 그들을 치료했다. 김 교사 안방의 커다란 약장 속에는 소화제에서부터「링게르」주사약까지 거의 모든 응급치료약은 다 갖추어져 있다.
1년 총수입이 3∼4만원 정도로, 농사지으며 부업이라야 소를 길러 파는 정도의 이곳 주민들은 조금만 안정되면 바깥으로 나가려고 할 뿐 공부를 안 한다.
김 교사는 금년 봄 이러한 주민들을 상대로 특히 서울 식모 살이라도 떠나겠다는 처녀들을 위해 야간학교를 열었고 남편은 이들에게 좀 더 돈을 벌 수 있는 여러 가지 직업들을 시법 해 보이느라 홍당무 재배를 했었다.

<수배 당선상금도 활용>
그동안 이들 부부의 노력은 이미 여러 군데서 표창 받았으며 김영옥씨의 수기는 최우수당선까지 했었다. 이들은 이 상금들을 『한푼도 개인용으로 쓰지 않고 분교장이 앞으로 자활운영 할 수 있게 하는 데에 모두 사용했다』고 말한다.
지난 가을에는 「텔리비젼」을 사다가 전기도 없는 산골에서 보게 했으며 최 교사가 새로 자원해간 격동분교와 아랫마을 원대 분교와의 전화가설, 학교 앞의 수영장 설치. 밤 밭 구입 등 모두가 이러한 상금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처음 6개월만 이 분교에 올라와 살려던 것이 이 마을을 버릴 수 없게 되었읍니다.』이곳에 와서 김 여사는 2남1녀의 어머니가 되었다.『우리가 한 일이 남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읍니디. 매달 두 사람의 월급7만여 원에서 4만원씩 저축을 할 수 있었고 농사짓는 법 등 앞으로 우리자신의 사업계획을 짤 수 있었으니까요.』
김 여사는 62년 강릉사범학교를 졸업했고 양양국민교 교사로 부임했다가 그곳에서 최 교사(한양공대중퇴)를 만나 64년에 결혼했다.
『젊은 동안 열심히 일해보자』던 신혼의 계획이 벽지교사가 됨으로써 알뜰한 저축을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소외당하고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을 「커다란 보람」으로 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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