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방생활 반년>
설날이라고 생색을 내면서 우리를 골탕먹인 일본경찰은 언제나 그렇게 음식에 있어 우리에게 후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우리 한글학자 일행29명의 집은 대부분이 서울에 있어 가난한 가운데서도 아끼고 아껴 음식을 해보냈다.
그때만 해도 일제말기에 접어들어 쌀은 사실 구하기가 점차 어려워갔으며 떡도 마음대로 해먹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가난한 한글학자의 아내는 하루 세끼 때마다 한 숟갈 두 숟갈 쌀을 모아 떡을 만들어 우리들에게 보내주었다.
서울 집에서 떡 같은 음식이 오면 일본경찰과 간수들은 자기네들이 거의 다 먹고 찌꺼기 몇 개를 남겨서 『너의 집에서 음식이 왔다』고 주는 것이었다.
이석린은 우리 동지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해 빠졌었는데 하루는 이석린을 집에서 음식이 왔다고 간수가 불렀다.
이석린은 홍원유치장에 갇힌지 처음으로 집에의 차입을 받는 것으로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나 왔다는 음식이 들어온 것을 보니 큼직한 그릇에 떡이 서너개 뿐이었다.
이석린은 그 서녀개의 떡을 받곤 더 이상 참지 못해 울어버리고 말았다.
대개 집에서 음식이 차입되면 이 감방 저 감방 나누어먹었다. 그러나 가난한 아내가 정성들여 만들어보낸 떡을 간수들이 다 먹고 서너개만을 남겨놓았으니 이석린은 분하고 서러워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만들어보낸 떡인데…아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떡을 해보내다니』하고 이석린은 한동안 넋을 잃고 멍해 있었다.
우리들을 지금까지 고문한 경찰은 더 이상 자백을 받을 수 없어 대개 마무리를 하는 듯 1월에 접어들자 조서를 꾸미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강압에 못이긴 허위자백에는 또한 증거가 있을 리 없어 조서를 꾸미는데도 애를 먹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범죄행위가 없다고 해도 독립을 목적으로 민족사상을 고취시킨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으니 범죄가 성립될 수 있다고 의식의 행위에 범죄근거를 두고 그런 목적을 위해 어떤 행위를 했는가 직접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조서는 사전원고의 낱말풀이부터 시작되었다.
『태극기·대한제국·이왕가·대궐·백두산·단군·경성(서울) 등에 대한 풀이가 반국가 사상의 표현이라고 했다.
이 원고를 쓴 각자의 학자는 결국 민족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런 내용의 낱말풀이를 했다고 자백을 써야했다.
우리들에 대한 심문조서는 1월 하순에 쓰기 시작하여 3월까지도 끝이 나지 않았다.
3월 말일에서 4월1일에 걸쳐 신윤국·김종철이 불구속으로 홍원까지 끌러와 문초를 받았다.
일제경찰은 혈안이 되어 하나라도 새로운 범죄구성 사실을 찾으려고 증인들을 마구 불러댔다.
그 동안 백낙준·정세권·곽상훈·김두백·방종현·민영욱·임혁규 등이 증인으로 홍원유치장까지 끌러와 심문을 받았다.
이렇게 까닭 없이 소환 당한 증인은 무려 48명으로 경성을 비롯, 각 곳에서 보조심문을 받았다.
우리가 갇혀있는 감방 밖 하늘은 어느덧 겨울하늘에서 봄기운이 여울져 아롱거리기 시작했다. 3월의 봄바람이 차디찬 가운데서도 살갗을 간지르며 솔솔 불기 시작했어도 우리들은 언제 풀려 나올지 까마득하기만 했다. 무료한 감방생활도 어느덧 반년이 지나고 있었다.
이제 몸에 익은 감방생활은 그럭저럭 지낼 수 있으나 가장 참기 힘든 것은 담배를 피울 수 없는 일이었다.
간수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쇠붙이와 불기운이 있는 담배통은 절대로 감방 안에서 지니고 있지 못하게 했다.
매일아침이면 정기적으로 간수들이 검방을 했다. 이 검방 때는 샅샅이 뒤져 심문을 받고 들어올 때 몰래 가지고 들어온 물건을 일체 압수해갔다.
특히 조그마한 쇠붙이와 담배·성냥 등에 신경을 썼다.
그러나 사람이란 언제나 환경에 적당히 순응하여 그때의 편의대로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스스로 터득하게되는 모양이다.
한 감방 친구 중에서 이희승과 김윤경은 담배를 못 피웠지만, 이은상과 서민호, 그리고 나는 담배를 피울 수 없어 안달을 했다.
그리하여 이은상·서민호, 그리고 나는 한 감방의 담배동지가 되었다.
담배동지는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 나름대로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우리 셋은 어떻게 담배를 한 모금이라도 피울 수 있느냐에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짜내기 시작했다. 【정인승】감방생활>
(626)-제자는 정인승|<제29화>조선어학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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