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피 어린 산과 언덕(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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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지도 말고 이기지도 말라』는 식의 「유엔」군 전략에 의한 작전이 전개되기 시작한 1951년 하반부터의 한국 전쟁은 중동부 산악을 중심으로 한 「고지 쟁탈전」이라는 새로운 양상을 띠면서 더욱 백열화 되었다.
암벽과 숲으로 둘러싸인 능선과 산봉우리들을 확보하기 위한 육탄전은 문자 그대로 적과 아군의 시체로 덮여 시산 혈하를 이루었다.
조그만 산봉우리 하나를 놓고 하루에도 수천발씩 쏴대 논 포탄은 바위와 나무들을 잿가루로 만들어 놓았고 심하면 산의 높이가 몇 m씩 내려앉기도 했다.
한국 전쟁이 피아간에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내면서 극도의 국지전으로 교착된 것은 휴전회담의 진행과 불가분의 유착관계가 있었다.

<거의 공산군이 선제 공격>
1951년 6월 23일 「유엔」에서 한국전의 휴전 협상을 제의한 소련 대표 「야콥·A·말리크」의 제안에 대한 6월 30일의 「매듀·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의 정식 동의는 사실상 전쟁의 종식 내지는 교착을 뜻하는 것이었다.
휴전 회담을 염두에 둔 「유엔」군과 미국 정부는 정략적인 배려에서 공산군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도의 「제한 전쟁」만을 전개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공산군은 이를 역이용, 51년의 그들 춘계공세에서 「유엔」군에 당한 참패를 설욕키 위해 진지들을 완전 요새화 하는 한편 휴전까지는 최소한 휴전선 이남의 고지를 탈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같은 공산군의 전략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대부분의 고지 전투들이 그들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휴전 회담의 진행을 위한 압력 수단으로 전개한 「유엔」군의 제한 전쟁은 결과적으로는 한국 전쟁을 2년간이나 더 끌어야 했고 이 동안에 동·서간의 너비 1백55「마일」에 걸친 한국의 산과 언덕은 흥건히 피로 물들었다.
「아시아」 공산주의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던 휴전 협상 「테이블」의 미국 대표는 마침내 51년 7월 30일 개성 본회의에서 회담이 진행중일지라도 전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데 공산 측과 합의했다.
이렇게 해서 2년여 동안 회담과 전투가 병행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휴전선만 지키고 있으면 그 동안 외교관들이 협상 「테이블」에서 어떻게든지 한국 전쟁을 해결 지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던 「유엔」군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혈전의 와중에 끌려들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전투는 「유엔」군으로서는 압록강까지 진격하거나 대이동 작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작전 목표를 엄격히 제한 받는 수세의 국지전만 전개하였다.
이에 비해 요새화 한 진지와 산악전에 경험을 가진 75만의 공산군은 52년 여름부터 50만의 「유엔」군에 대항해 중동부와 동부 산악지방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제한 공세로 나왔다.
김일성 고지·피의 능선·도솔산·저격병 능선·백마고지·수도고지·351고지·단장의 능선·949고지·노리 고지 등지에서는 산정의 주인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백병전이 휴전 조인 때까지 계속됐다.
한국군 제 5·2·3·9·6·8·11·15·수도 사단과 해병대·미군 제 2·7·25·45사단과 해병 제1사단 등은 이 같은 고지에서 하루에도 수 백명씩 사상자를 내면서 수적으로 우세하며 이 때는 화력도 「유엔」군과 비슷한 공산군과 싸워 끝내 전선을 방어했다.
2년 동안에 걸쳐 벌어졌던 피비린내 나는 이 『고지 쟁탈전』 양상을 당시의 참전 지휘관들은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정일권씨(당시 제2군단장=중장·예비역 육군대장·현 공화당 의장서리·55) <고지 쟁탈전은 휴전 회담의 진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봐야될 것 같습니다.
「유엔」 측과 공산 측이 한국 전쟁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의도로 휴전 회담을 시작하자 군사력에 의한 물리적인 대결은 회담 진행을 위한 도구로 사용됐고, 전쟁의 양상은 요새의 고지들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제한 전쟁으로 전개된 거지요.
또 휴전선에서 전쟁을 멈추고 휴전하려는 「유엔」군 측의 의사와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공산 측 의도가 충돌함으로써 고지 쟁탈전은 더욱 가열화 돼 갔구요.

<전술 대결의 「병정 놀이」격>
이 고지전은 비록 정치적 제약을 받는 전술 대결의 『병정놀이』이긴 했지만 한국 전쟁중의 전투로서는「하일라이트」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잠시 전선이 소강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공산군은 전력을 재정비하고 전 진지를 요새화해서 강력한 전투력을 배양해 놨어요.
공산군은 군사력의 우위라는 힘의 배경을 업고 회담을 유리하게 이끌려던 「유엔」군 측에 일격을 가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담을 정치적으론 결렬의 위기로 몰아넣으면서 그 동안 정비해 놓은 군사적 「실력」으로 일대 소모전을 전개, 치열한 고지전을 벌여온 거지요.
52년 하반기부터 각 전선에서 본격적으로 벌어진 고지 쟁탈전의 양상은 정말 처절했습니다.
중동부와 동부전선 산악지대에서는 공산군의 인해 전술과 막강한 화력을 동반한 아군의 반격으로 거의 매일같이 피아간에 막대한 피해가 났어요.
한 고지에서 주인이 몇 십번씩 바뀌는 쟁탈전이 전개되면 돌산도 무릎까지 빠지는 흙더미로 변했고 심지어는 산이 몇자씩 내려앉기까지 했어요.
먼지 구덩이 속에 나뒹구는 수많은 해골과 팔다리는 아군의 것인지 적의 것인지 조차 분간할 수 없었고 목이 타는 병사들은 해골에 괸 물들을 거침없이 마셔야했습니다.

<이빨로 물어뜯는 육박전도>
항공 지원이나 포격이 그다지 유효하지 못한 험악한 고지에서는 반「게릴라」전의 양상을 띤 육박전이 전개돼 대검과 수류탄으로 맞서고 때로는 이빨로 물어뜯으며 안고 뒹굴기도 했어요. 전투가 심할 때는 매일같이 소모된 우리 병력을 신병으로 보충해 올려 보내면 「총알받이」라는 비참한 전장의 별명이 붙은 채 또 희생되고 말았어요. 물론 적의 인명 피해에 비해 아군의 희생은 훨씬 적었지만 6·25 전쟁중의 아군 「전사」의 상당 부분이 고지 쟁탈전 동안에 생긴 게 사실입니다.>
▲한신씨(당시 한국군 제5사단 부사단장=대령·현 합동 참모본부 의장·대장·50)<고지 전은 요새지 쟁탈을 주로 하는 제한된 국지전이었기 때문에 때로는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인 중요성에 비해 너무도 큰 희생의 댓가를 지불해야되는 전투를 하기도 했어요.
당시 우리 국군 지휘관들의 작전지휘권만 해도 뺏긴 고지를 탈환하는데는 예하 병력을 자유재량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새로운 적 진지나 적수중의 고지를 공격할 때의 병력 사용은 자유 재량으로 못하고 미 8군사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어요.
엄격한 통제를 받다보니 진격할 기회나 전투력이 있어도 상부의 지시로 좌절되고 마는 때도 많았습니다.
진격의 기회를 잃고 가슴이 아플 때도 한 두번이 아니었지요.
좁은 고지 하나를 두고 피아간에 몇 십번씩 뺏고 뺏기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되풀이했던 겁니다.
52년과 53년에 걸쳐 백병전이 전개됐던 대부분의 고지나 능선들은 군단 규모나 사단 규모의 작전은 전혀 불가능한 협소한 곳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제한 된 전투는 휴전회담을 위한 물리적인 군사력의 억제에 따른 거였겠지요. 아마 이 같은 입장은 「유엔」군이나 공산군이 동일했던 것 같아요.
휴전선 확정을 위한 전투를 시도하였지 그 이상의 공방전 문제는 쌍방 공히 염두에 없었다고 봅니다.>

<적 참호 파괴엔 자폭 결사대>
▲유근창씨(당시 국군 제2사단 32연대장=대령·예비역 육군중장·현 국방부 차관·47) <휴전 회담 진행에 따른 전선의 교착을 틈타 진지를 동굴화 하고 전력을 보강한 공산군은 그 동안 「유엔」군에 당한 패배를 설욕코자 산악지방을 중심으로 52년부터 일대의 결전을 시도해왔어요.
우리는 포격으로는 파괴할 수 없이 요새화 된 적의 참호나 동굴 진지들을 수류탄을 까들고 들어가 자폭하면서 파괴해야하는 결사전도 벌였어요.
공산군의 공격도 상당히 제한된 것이긴 했지만 요새지를 확보하고 실지를 탈환하려는 그들의 집념은 아주 집요했어요. 적의 고지 공격은 결과적으론 피아간에 수많은 인명 손실을 냈을 뿐 전선에 큰 변동을 가져오지는 못했습니다.
약간의 변동이 없진 않았지만 공산 측이 회담 초 정치적 수법으로 피 한방울 안 흘리고 개성과 연백평야를 거쳐 얻은 서부전선의 경우에 비하면 중동부나 동부의 고지 전을 통해 우리가 확보한 지역은 너무나 값비싼 피의 대가를 지불한 거였어요.
각 고지의 백병전은 거의가 공산군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됐고 아군은 방어와 탈환에 주력했어요.>
◆주요일지(1952년 5월 7일∼10일)
※7일 ▲거제도 포로 수용소장 「도드」준장 피랍 ▲「클라크」사령관, 동경 착임
※8일 ▲「유엔」군, 하루에 5천 1백 발의 포탄 발사 ▲장택상 신총리, 공무원의 다방·요정출입 금지령
※9일 ▲「밴플리트」 8군사령관, 거제도로 급행 ▲이 대통령, 이임하는 「리지웨이」에게 훈장 수여 ▲소련, 「유엔」군이 세균전 감행했다고 비난
※10일 ▲공산 포로들, 「도드」소장 석방 ▲포로 교환 토의 휴전 회담, 1분만에 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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