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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의 숨은 사상가 유 대치|역사학회 월례회서 이광린 교수 발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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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조 말의 실학 및 개화사상연구에 있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대치 유홍기의 존재가 새로 인식되고 있다. 이광린 교수(서강대)는 23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열린 역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숨은 개화사상가 유대치」를 발표, 이조 말 개화파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사회개혁의 이론을 폈던 숨은 인물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조선말 순조 때인 1831년에 중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유 대치는 양반도 관료도 아닌 순수한 서민의 생활 속에서 그의 인격과 학문을 통해 당대의 급진적인 유능한 양반 집의 자제들을 지도했던 인물이었다.
당시 무력을 앞세워 쳐들어왔던 서양세력에 대처해서 조선의 일대혁신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대치는 그의 이웃에 살던 같은 중인의 동갑친구인 오경석이 청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다녀올 때마다 가져온 각종 신 서적을 연구해왔으며 오와 더불어 북촌의 양반자제 가운데서 인물을 구해 일대 정치개혁을 통한 국가발전을 꾀했다.
이는 경석의 아들 세 창이 기록한 글에도 나오고 있다.
박 규수에게서 실학과 개화를 배웠던 청년들은 박 규수가 서거한 l877년부터 오경석을 통해 유 대치와 만났으며 이들은 지리와 역사·정치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불교에 밝았던 그는 한국개조의 긴박성을 느끼고「불교국익 관」을 폈었다. 김옥균도 뒤에 술회했듯이, 실천적 종교로서의 불교의 장점을 강조한 유 대치의 가르침에 따라 이들은 모두 유교지상체제를 배격하는데 앞장서게 됐던 것이다.
그는 정치개혁을 위해 먼저 정부기구개혁을 주장, 1882년 임오군란 뒤에 구성된 감성청에 실무직원으로 들어갔다. 중인 출신으로 잡과조차 치르지 앉았던 그였지만 사상가·경륜가로서 널리 알려졌던 만큼 관직에 등용되었던 것이다.
6개월 간 존속했던 감성청은 기구정리 안을 마련하기도 했으나 반대파의 방해로 개혁을 이룩하진 못했다. 그 뒤에도 윤치호의 일기에는 여러 차례 그를 등용하도록 주 청했다고 기록이 나오나 실현되진 못했다.
그의 지도를 받았던 청년들에는 김옥균·서광범·박영효·이종원·이정환·박제경·오경석 경 윤 경 림 3형제·김영한 영문 형제·한세진·이희목 등이 있었다. 또 이동인·탁정식 등 승려도 그의 지도를 받았다.
윤치호도 거의 매일 유 대치 댁을 찾아 입궐해서 할 얘기들을 의논했다.
윤 대치의 주장에는 ⓛ청의 간섭을 물리치고 자주외교를 해서「러시아」「프랑스」와도 조약을 맺을 것 ②재정의 통일 ③미국에서 군사교관을 초청해 군을 훈련해야한다는 등이 있었으며 이것은 윤 치호에 의해 일부 요청되기도 했다.
1884년 온건파들이 군을 지배하고 차츰 개화파에 압력을 가하자 개화파는 정권쟁취를 결의하게 되고 일본공사 죽 첨과 결탁했다.
과격한 행동에 관해 유 대치는 소극적이었고 특히 일본을 믿을 수 없고 또 서울주둔 일군이 적은 수였던 점을 우려했었다.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김옥균 등이 망명했을 때 개화당의 막후지도자 유 대치는 사라졌다. 그가 산에 들어가 참선 끝에 죽었으리라는 추측도 나돌았다.
「의금부등록」등에 나와있는 체포대상에 그의 이름이 있었으나 대치가 잡혀 들어간 것 같지는 않으며 정변 중에 다른 동료들이 당한 것같이 매맞아 죽었을 것 같기도 했다.
뒤에 1908년 강구회가 조직되고 애국사사추도회가 열려 유 대치도 99명의 추도대상에 올랐고 이중 38명은 개화파인사였다.
합방이 되기 1주일 전인 1910년 8월21일엔 정부가 유 대치를 정삼품규장각부제학에 추이하기도 했고 l940년 일제는 그에게 대동아공영의 공로가 있다고 상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일제나 일제앞잡이들의 유 대치에 대한 상 훈은 김옥균에 대한 대접과 마찬가지로 이들을 친일파로 일반에게 알려 자기들과 한가지의 사람으로 인식시키려던 비열한 책략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 대치나 김옥균 등은 앞으로 이들을 올바로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릇된「이미지」를 벗겨 친일파들이 욕되게 이용했던 그들의 이름을 빛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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