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설사의 부운거사전 『부설전』으로 밝혀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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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단국대 국문과는 지난 7일부터 10일 동안 전라남북도 일원에 걸친 국어 국문학 관계 자료 조사를 위한 학술답사를 마쳤다. 김석하·남풍현 교수와 필자, 그리고 학생 13명으로 편성된 이번 답사반의 수확은 필사본 『부설전』의 발견으로서 국문학사의 자료를 재확인한 점에서 하나의 수확이 됐다. 일찌기 김태준의 『조선 소설사』에는 『변산 월명암에 전하는 「부운거사전」은 승전으로서 상당한 소설적 체체를 가진 것』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여기에 단서를 얻은 본 답사반은 이번 조사의 코스 가운데 변산반도의 월명암을 포함했던 것이다. 월명암(부안군 산내면 중계리 산 97의 1)은 해발 448m의 쌍선봉 등성이에 자리잡은 작은 암자였다.
월명암에서 현지 조사한 결과 김태준이 이른 바의 『부운거사전』은 과연 현존하고 있었는데 「부운」이 아니라 「부설」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조선 소설사』에서 왜 「부운」이라고 적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뒤 학계에서 그대로 받아 써온 점은 앞으로 시정되어야할 것이다. 『부설전』에 관해서는 『조선 소설사』에서도 그 내용에 관해서는 별 언급이 없었고, 일제 때 김대은 스님이 소책자로 부설을 소개하는 글을 발간했다고 하나 현재로서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월명암에 소장된 『부설전』은 표지를 포함해서 모두 10장의 9절지 한지 선장본에 한문으로 쓴 승전이다.
글씨는 비교적 전아한 해서로 되어있고 『부설전』이라는 표제 이외에 「월명암 유전」이라 하여 월명암에 전해 내려오는 것임을 밝혔다.
다시 「갑자년 9월 23일 서」라 필사연대가 적혀 있는데 확실한 「갑자」의 연대를 잡기는 어렵다.
부설거사는 바로 월명암의 초창주로 그 때가 신라 신문왕 12년(임진·692년)이자 바로 효소왕 1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연대가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를 확언하기가 어렵다.
월명암에는 필사본의 『부설전』과는 별도로 부설거사에 관한 구전들이 심심치않게 전하고 있다.
부설에 관한 이야기는 구전·필전의 내용을 다 포함한 것이 원형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문필화하는 과정에서 점잖지 못한 내용은 모두 삭제될 것으로 보인다. 한문 필사본은 수도의 계제를 따라 도담을 엮어 나갔는데 간간 시음을 섞어 분위기를 꾸려 나갔다.
이 이야기의 발생을 월명암의 창기 당시로까지 소급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면 『부설전』 의 형성은 적어도 여대로 올려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여간 자료가 희귀한 고대의 설화·소설분야에 훌륭한 승전이자 설화소설 자료로서 『부설거사전』은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필사본 『부설전』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신라 진덕여왕 초에 경주 남내에 진씨의 아들로 광세라는 영특한 아이가 있었다. 5세에 불국사 원정선사에게 가서 머리 깎고 7세에 이미 불법에 통하였다. 이름을 부설, 자를 천상이라 뷸렀다.
그는 등지인 영조와 영희와 함께 변산 법왕봉 아래 초막에서 수도에 정진한 뒤 오대산 문주도장에 가려고 길을 떠나 도중 청신거사 집에서 묵게 되었다. 거사에게는 묘화라는 한 딸이 있었는데 용모가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나고 유화하고 절조 있는 처녀였다.
이날 부설의 설법하는 음성을 들은 묘화는 크게 감화되어 목숨을 걸고 부설과 부부가 될 것을 청하였다.(구전 설화는 묘화가 맹인이었는데 부설의 설법을 듣고 눈을 떴으며 그래서 삼세의 연이 있다 하여 부부의 연을 맺으려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부설은 비록 사문의 몸이기는 했으나 생명을 중히 여겨 묘화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영조·영희 두 사람은 길을 떠나며 낙오한 도우의 앞일을 염려하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부설은 답하여 재가성도의 뜻을 밝혔다. 『도는 승과 속에 차등이 있지 않으며…제불방편의 뜻은 오로지 중생을 이롭게 함에 있다』고.
부설은 묘화와 부부가 되어 등운·월명의 남매를 낳았고 도의 경지가 옛 도우들을 훨씬 능가했다. 또한 등운과 월명도 부모의 뜻을 이어 머리를 깎고 입도했다. 묘화는 집을 암자로 삼고 부설암이라 이름하였고 두 남매가 수도하던 곳도 등운·월명의 이름을 가진 암자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편 등운·월명 남매에 대한 이 지방의 구전설화를 이번에 채집했다.
등운과 월명이 각각 불도를 닦고 있을 때 월명의 아름다운 자태에 이끌린 부목(절에서 나무일을 하는 일꾼)이 월명에게 욕정을 품고 접근했다. 월명은 부목의 간절한 요구를 물리쳐야 할 것인지를 오빠 등운에게 의논했다.
등운은 부목의 간절한 요구를 들어주라고 하여 월명은 부목에게 그 청을 세번 들어주었다. 그러나 등운은 동생 월명이 욕정에 점점 빠져 들어갈까 두려워서 그 부목을 죽여 버렸다.
죽은 부목은 염라대왕에게 가서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 염라대왕은 곧 등운을 잡아오도록 차사를 여러 번 보냈는데 입선중이라 못 데려 갔고 끝내 등운의 편지(부목을 죽인 사연)를 받은 대왕이 그제서야 감동되어 등운을 잡아올 생각을 버렸다는 것이다.
황패강<단국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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