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제자 윤석오>|<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4계 어록(137)|손원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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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 박사와 해군>
이 박사는 해군을 유난히 아끼고 중요 시 했었다.
이 박사가 환 국 후 지방순회강연을 할 때의 일이다. 진해에서 해안경비대를 이끌고 있었던 나는 어느 날 대원 2백 여명을 데리고 마산으로 이 박사의 강연을 들으러 갔다.
맨 앞자리에 앉은 우리를 포함하여 군중은 수 만 명에 이르렀다. 이 박사는 등단해서 뜨거운 환영에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우리 나라는 3면이 바다인 만큼 이 해안을 지키고 그 속의 무궁한 자원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강조하는 연설이었다.
마산이 해안도시인점도 고려되었겠으나 그보다는 우리해군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다. 이때 우리대원들은 군복이 없어 통일된 복장을 못했을 뿐 아니라 신발도 제멋대로 이었다.
『맨 앞줄에 있는 우리해군 용사들을 보시오. 비록 군복도 재대로 입지 못하고 남루한 옷차림을 했기만 씩씩하기 이를 데 없는 기상을 볼 때 우리바다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겠소이다.』이 박사는 다소 흥분했던지「육 해 군」이라 하지 않고「해 육 군」이란 표현까지 썼던 기억이 난다.
48년 8월15일 나는 이 박사에 의해 육군의 송호성 군장과 함께 해군준장으로 처음 임관이 됐다.
이때는 해군이 정식 발족되기 전이었으나 나는 정부수립식전에 인솔한 해안경비대원들에게 미리 준비했던「대한민국해군」이란「마크」를 정 모에 달도록 했다. 식전에서 이것을 눈여겨본 이 대통령은 나에게『정부수립도 되기 전에 벌써 해군이 탄생했구먼』이라고 놀라면서『의욕과 패기에 넘친 자세가 좋다』고 칭찬해 주었다.
이해 11월30일 국군조직법이 공포되면서 육군과 더불어 해군이 공식으로 창군되었다. 이 때 초대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된 나는 이후 업무와 관련해서 이 대통령을 더러 만나게 되었다.
이 대통령은 특히 초창기의 해군장비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다.
주 장비인 함정이 형편없었을 뿐 아니라 이 무렵에는 장병의 기본화기도 확보가 안되었다.
해안경비대시기에 처음으로 미 해군에서 인수한 5백t급의 상륙 정 LCI 6척을 비롯하여 유조선 1척, 소해 정 20척 등 모두 36척이 확보되어 전 해안선에 배치했으나 건조연한이 오래되어서 영 선과 정비에 애로가 많았다. 또 대부분이 소해 정이고 장치된 병기가 37mm 포2문 정도의 미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건국 초의 빈약한 재정 면으로나 기술면으로 보아 해군이 필요로 하는 함정을 구입하거나 건조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이 대통령은 이러한 실정을 안타까워하면서 함정을 확보할 무슨 묘안이 없느냐고 자주 물었다. 그리하여 생각 끝에 기금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49년 6월「함정건립기금 갹출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우선 해군장병들은 박봉을 털어 기금운동에 앞장섰다. 장교는 봉급의 10%, 병조 장(현 상사에 해당)은 7%, 병조이하는 5%씩 매월 봉급에서 갹출했고 해군부인회에서도 따로 기금모집에 적잖이 협조하였다.
당초에는 함정을 건조할 계획이었으나 기술과 시일이 문제되어 결국 미국에서 구입하기로 결정, 내가 배를 구하러 미국에 떠났다. 그런데 이 때 갹출한 금액은 우리가 사려던 배 값에는 훨씬 미달하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이러한 우리의 노력을 기쁘게 여기면서, 액수가 기억나지는 않았으나 상당한 보조금을 주었다.
주미대사관의 주선으로 입찰한 결과 구 잠 함(PC형)1척을 6만「달러」로 사서 이 배를 「백두산 호」라 명명했으니 말하자면 민족의 얼이 담긴「건국함」이었다. 이때 구입한 함정이「701함」이며 당시 박옥규 중령이 함장이 되어 그 해 12월「뉴요크」를 출항, 50년 4월10일 진해항에 그 웅장한 모습을 나타냈다.
나는 남은 돈으로 싼 배를 더 구입하기 위해「샌프란시스코」에 갔다. 마침 그곳에는 2차 대전 때 쓰던 배들이 남아돌아 배를 팔고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곳 총영사관의 주선으로 책임자들과 직접 상담한 결과 앞서 산「백두산 호」와 꼭 같은 구 잠 함을 한 척에 1만2천「달러」씩 3척을 구입하게 되었다.
이것이「702」「703」「704」함인데 이 배가 편대항해로 진주만 군항에 도착하여 교포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고있을 무렵「6·25몽」남침의 급보가 날아들었다. 서둘러서 귀국한 때는 전세가 크게 불리한 7월16일 이었으니 진해항에 도착한 길로 이 함정들은 서해와 동해의 작전에 배치되었다.
이들 함정의 전과가 혁혁해서 뒤에 인천 상 륙 작전에도 참가했으니「백두산 호」의 구입은 시의가 적절했다 하겠다. 이 대통령은 전쟁 중에 늘 국민과 해군장병의 성금으로 사들인 함정에 대해 자랑삼았던 것을 잊을 수 없다. <계속>
손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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