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해빙의 선두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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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동서 해빙의 선두주자, 전후25년 동안 계속되어 온 「유럽」전쟁상태의 종결자로서 각광을 받아 온「브란트」서독수상은 금년도 「노벨」평화상을 수당하게 되어 그의 화려한 정치경력에 또하나의 「메달」게 됐다.
69년 10월 서독수상에 취임한 후 그가 추진해온 「오스트폴리티크」 (대 동구정책)는 그 동안 동서 「유럽이 긴장의 초점이었던 서독·소련」「서독· 「폴란」은 분쟁의 실마리를 푸는데 기여했다.
그는 2차 전후 소련에 의해 일방적으로 소련·「폴란드」에 병합된 속부 지방의 회 독일영토 포키하는 등 「유럽」의 현실을 인정한 최초의 서독을 정치가였다.
지난해 8월과 10월에 소련· 「폴란드」와 맺은 상호무력 포기조약은 이를 뒷받침, 동서해빙의 결정적 당기회 마련했다.
이 계기로 「유럽」 긴장의 완화점인「베를린」문제도 미·부·불ㆍ당 4대국의 협정으로 매듭지을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는 바로 「나트」와「바르샤바」 동맹군의 병력감축을 비롯, 소련이 주장하고있는 「유엔」 안보회의용 「유럽」이 평화질서 모색하는 필율 터놓게 된 것이 다「브란트」 의 이러한 유연한 대동당정책은 처음 서만섀개로우더 공산당의 주장에 너무 양보, 상대적인 소득을 받아내지 못하리라는 우려로 견제를 받는 한편 동구 측으로부터는 「브란트」의 적극적인 동구정책으로 서구의「리버럴」한 기풍의 살도로 체제의 약화를 초래할까봐 기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브란트」 는 이러한 여러 가지 제약을 극복, 지난달 27일 부터 대 「체코」국교정상화교섭에 들어갔다. 뒤이어 「헝가리」「슬로바키아」등이 잇달아「브란트」의 동구엉책은 일단 매듭을 짓게 될 것 이다.
1913년 독일북부「발틴」 해안의 항구도시 「뤼베크」에서 여점부의 사생아로 출생한「브란트」의 원명은「헤르베르트·칼· 프람」 사회당 실년 동맹에서 노동운동을 벌이다 「나치스」의 집권으로「블랙·리스은」에 오르자「빌리·브란트」로 개명,「노르웨이」로 망명, 신문기자, 노동운동을 지도하며 반 「나치」 항쟁을 벌였다.
전후 47년 「노르웨이」군 장교로 「베를린」에 파견 됐다가 다시 독일단적을 되찾아서 「베를린」시장을 역임하고 66년 기민당과의 대련정에서 외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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