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무역>
이번에는 남북무역얘기를 좀 해보자. 원래 무역이란 것은 남남끼리 하는 것이지만, 그때에 벌써 북쪽은 남이나 다름없어 남북간의 거래를 남북무역이라고 했다.
해방 후 남이고, 북이고 할 것 없이 물자가 부족한 판에 무슨 거래가 있었겠느냐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사정은 그렇지가 않았다.
남한은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장크」무역이니, 혹은 「마카오」「홍콩」무역이니 하는 대외거래가 비교적 활발했던 데다가 미국에서 원조물자를 속속 보내줬기 때문에 일상생활에 쓸 물자가 그렇게 궁핍하지는 않았으나 전력이 거의 없는 거와 다름없었으며, 이에 반해 북한은 전력은 남아돌아 갔지만, 일용품과 공업용원료가 부족한 처지였기 때문에 남북무역은 쌍방이 모두 원하는 거래로서 해방직후부터 정부수립이후 얼마동안까지도 계속됐던 것이다.
따라서 남북무역은 먼저 군정이 전기사용료조로 전기동과 생고무, 그리고 그밖에 일용품 등의 잉여물자를 주는 형태의 정부무역으로 시작해서 점차 민간무역도 허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해갔다.
군정당국은 해방되던 해 11월 남북간 「바터」무역을 고려중이라고 말한데 이어 이듬해 2월 『북조선과의 무역은 통제품 외는 자유』라고 정식 발표했다.
여기서 통제품이라고 한 것은 주로 쌀을 비롯한 식량과 귀금속류로 기억되는데 식량이 워낙 부족한 때였기 때문에 당시 쌀유출에 대한 규제는 다른 어느 물자보다 엄격했다. 1948년 여름 당시 군정당국발표에 의하면 과거 2년간 도입한 외곡이 물경 5백만섬이었다고 한 것으로 들었다.
남북무역이 허용되긴 했지만, 주종은 역시 정부가 전기사용료조로 보내는 것을 대행하는 것이었으며, 민간의 순수한 물물교역은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왕래가 가능했던 때니까 소규모 거래는 꽤 있었겠으나 북편으로 많은 물자를 교환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저 유명한 앵도환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정부수립후의 일로서 이때는 과거 때와는 상황이 좀 틀린 때였기 때문에 먼저 그간의 여건 변동에 관해 약간의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남한이 단독으로 정부를 수립할 태세를 굳혀가자 북한에서는 1948년5월14일을 기해 돌연 남한에 대한 송전을 중단해버렸다. 세칭 5·14단전이 바로 이것이었다.
남쪽은 일시에 암흑세계가 됐다.
이에 따라 정부는 발전함을 증강하는 등 위기를 타개하는데 힘쓰는 한편 그해 8월15일 정부수립 후에는 북괴집단과 송전재개교섭을 벌였으며 이와 동시에 5·14단전 이후 사실상 중단해온 남북교역을 재개시키기 위한 획기적인 계획을 그해 11월에 발표했다.
이 조치에 입각해서 화신무역의 앵도환이 그해 겨울 떠나게 된 것이다. 그때 박병교 사장은 「홍콩」에 있었고, 그와 처남매부사이인 김정도씨(여류소설가 김의정씨 엄친으로, 당시 중앙교역사사장)가 대행해서 광목과 기타 잉여물자를 실어보냈다.
당시 상공부장관이던 임영신씨의 허락을 얻어 원산항으로 보냈는데 중앙교역사 지배인이던 김기정씨(전한국합동무역사장)가 선원 몇 사람과 함께 갔으며 화신측에서는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앵도환이 떠나고 얼마 안있어 정부는 반민특위를 구성, 박흥식씨를 투옥했다. 이렇게 되자 북괴는 반동의 재산이라면서 배와 물건을 몽땅 뺏고 사람만 놓아주었다. 다행히 김기정씨 일행은 이듬해 봄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으나 배는 영영 못 오고 말았다.
앵도환이라면 48년4월 해방 후 최초의 한국무역선으로 「홍콩」에 갔던 바로 그 배인데,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화신과 김정도씨는 큰 손해를 보았다. 조선우선은 이 배를 보험에 넣었었기 때문에 다행히 손해는 면했다.
49년 봄 내가 「홍콩」에 갔었을 때 김정도씨가 그곳에서 행여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오지 않을까 애태우면서 매일 술만 마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무렵 이한원씨의 동아상사에서는 옛날 중국서 본대로 인삼을 설탕에 달여서 만든 당삼을 「홍콩」에 수출했는데 잘 팔리지 않아 속이 상해있던 그 부사장 김영규씨(김웅규욋과의원 원장백씨)와 김정도씨가 맞붙들고 술을 마시면서 평안도 수심가를 영어로 직역해서 부르며 이역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던 모습도 역시 눈에 선하다.
아뭏든 이사건을 계기로 남북무역은 완전중단되고 말았다.
남북무역은 아니지만, 북괴가 빚은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을 얘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것은 「홍콩」에서 장우공사를 하던 중국상인 양경파씨의 얘기다.
양씨는 화신을 비롯한 우리나라무역업계와 거래가 빈번하고 친교가 두터웠던 사람이었지만, 북한을 상대로 해서도 교역을 많이 했다. 「홍콩」무역은 우리만이 한 것이 아니고 북한도 했는데 그 상대가 주로 양경파씨였다. 48년 겨울 당시 AP통신은 북괴와 「홍콩」간의 무역이 성행중이라고 보도한 기억이 난다.
양씨가 우리의 앵도환사건 후에도 계속해서 북괴와 계속 교역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 역시 마지막에는 대금을 못 받는 등 엄청난 손해를 보았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빚더미에 앉아 견디다 못해 얼마 후 자살하고 말았다.
앞서의 앵도환 사건도 그렇지만, 실로 가슴아픈 일이었다.
그때 오모중(우모쭝)이라는 사람이 장우공사직원으로 강씨 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대북에서 큰 무역상을 한다고 들었다. <계속> [제자는 필자]계속>남북무역>
(202)제14화 무역…8·15전후(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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