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권좌의 쇼윈도 북평의 천안문|AP 로드릭 기자가 본 주변의 모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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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편집자주=다음은 근 4반세기만에 처음으로 중공을 방문한 후 20일 「홍콩」으로 돌아온 AP 통신의 「존·로드릭」기자가 쓴 글이다.
【북평 21일 AP동화】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천안문에서 도금한 목제 봉황새 속에 칙령을 하달했다. 주황색의 천안문 앞에 펼쳐진 거대한 1백 「에이커」 넓이의 광장은 북평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중공의 정신적 및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하다.
중공이 노동절인「메이·데이」행사를 준비하느라고 길게 뻗친 낮은 적색 벽과 황제들이 거처했던 자금성에는 수리를 하고「슬로건」 등을 다느라고 발판이 늘어져있다.
내가 1947년 보았을 때 천안문은 정치적 중요성이 없었으며 당시 수도는 남경으로서 북평은 동화에 나오는 도시인 듯 과거에 파묻혀 있었다.
49년 1월31일 전투 없이 북평을 점령한 공산주의자들은 천안문을 그들의 제도의 중심지로 삼았다.
1년 중 두 번 5월1일의「메이·데이」와 10월1일의 정권수립 일에는 방대한 군중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행진·연설·불꽃놀이를 구경하곤 한다.
모택동은 수도를 북평으로 정한 후 새 질서를 기념키 위한 방대한 공공건물 건설의 계획을 마련했다.
인민 전당과 역사혁명 박물관 등이 그러한 것이다. 인민 전당엔 가운데 있는 큼직한 화강암·「오베리크」에는 중국의 역대 영웅들과 큰 사건을 아로새겨 기념하고 있다.
예를 들면 1851년 외국인 소유의 아편을 파괴한 관리, 1851년의 「타이핀」 농민반란, 청조 타도, 1919년의 「베르사유」 조약 반대, 5·4 운동, 1925년의 반일·영 「데모」, 1927년의 남창군사 반란, 1949년 공산군의 양자강 도강 등이다.
방대한 인민 전당의 연회실은 5천명, 극장은 1만 명을 각각 수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지난 58년 10개월만에 완공된 이 인민 전당은 중공 입법기관인 인민대표대회의 소집장이기도 하다.
금년중 이를 소집토록 되어있으나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모르는 것 같았다.
73세 임에도 활기 있고 용모 단정한 수상 주은래는 이 건물의 「메인·살롱」 중의 한군데서 미 탁구 단을 접견했다.
주은래는 이「살롱」에서 지난 14일 미국인들에게 앞으로 미국과 중공 사이에 상호 방문이 잦게될 새로운 관계의 이정표가 이룩되었다고 말했다. 인민 전당이 호화롭게 꾸며져 내부 장식은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어지럽게 하나 이는 역대 주도이던 북평의 장엄하고도 고상한 건축미에는 겨눌 수 없다.
「참안」이란 대로는 천안문 앞을 지나는 거리로 여기는 국무원·체신부 및 현재는 배로 증축된 북평 「호텔」이 서있다.
북평 인구가 2백만에서 5백만으로 늘어났으나 마치 큰 콩깍지 속의 작은 완두콩 같이 보잘것없어 보이고 거리는 혼잡을 이루지 않고 있다.
북평 시가는 다소 열의나 정기가 빠졌다 하겠다. 아주 말쑥하고 새로운 도로·정원 등을 만들기 위해 벽은 헐려지고 있으며 수천 주의 수목이 풍화작용으로 인한 먼지를 제거하기 위해 심어지고 있다.
그러나 새를 공중에서 쫓아보내던 노인들, 이상한 소리를 내는 휘파람 등은 이제 찾아볼 수 없고 종적을 감춘 것은 이밖에도 「그랜드·호텔」에 있는 인력거꾼들이다.
북평에는 우수한 요리고기 음식 장이 많이 있으나 이국적이던 음식 맛은 지난날의 더러운 식탁보와 어두운 내부 그리고 이따금 나타날 때가 있는 생쥐 등 옛 정경이 없어 아취가 없어진 것 같았다.
북평의 밤은 요즘 일찍 찾아와 저녁 8시쯤 되면 자전거를 타고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 외에는 거리는 사실상 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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