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가 된 철학자의 존재론 강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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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철학교수들이 한 농부의 회갑기념 논문집을 출간했다. 변산공동체학교를 일궈낸 자칭 '농부' 윤구병씨의 회갑을 기념해 그가 그 동안 썼던 글을 묶어 '윤구병의 존재론 강의:있음과 없음'(보리刊)을 내놓은 것.

윤구병씨는 1996년 생태공동체를 가꾸기 위해 교수직(충북대)을 버린 인물이다. '시대와 철학''철학과 현실'에 연재했던 글과 대담을 엮어 만든 이 책도 그로 하여금 대학을 버리고 생태공동체 건설에 나서게 한 실천적 문제의식을 존재론적으로 조망한 것이다.

대화체로 엮은 이 책의 핵심적 화두는 '미래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다. 그런 만큼 존재론적 문제의식과 실천적 맥락이 치열하게 교직(交織)돼 있다.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없다'인가""'있는 것'보다 '있어야 할 것'이,'없는 것'보다 '없어야 할 것'이 앞선다"등의 제목에서도 그의 철학은 잘 드러난다.

기자가 전북 부안의 변산 공동체학교에서 생활하고 있는 '농부'와 어렵사리 전화 통화를 했을 때 그는 "땔감을 마련한 뒤 공동체 식구들과 저녁식사 중이다"라는 말을 먼저 했다.

이어 그는 이번 책에 대해 "'있어야 할 것이 있고 없어야 할 것은 없는'당위와 미래의 희망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천적 존재론을 꿈꾸는 그의 철학을 집약한 셈이다.

실천을 강조하는 농부의 글이라고 해서 자칫 도덕 교과서 같은 에세이류(類)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다르다.

대졸 학력으로도 서양 고전철학의 태두로 존경받았던 고 박홍규(전 서울대) 교수 밑에서 수학한 그는 이 책에서도 고전철학의 정수를 쏟아놓는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이 왜 변화를 설명할 수 없는지, 다(多)의 공존과 하나됨의 접점을 통해 생태철학과 공존의 존재론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대목엔 강단에서 넘볼 수 없는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윤구병씨의 철학은 '있음/없음'의 존재론을 징검다리로 해서 '있어야 할 것, 없어야 할 것'이라는 실천론으로 넘어간다. 거기서 그가 꿈꾸는 목표는 '억압.착취.전쟁.이기심.탐욕.증오처럼 없어야 할 것들이 없는' 사회다. 그러기 위해 그는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긴밀하게 연관 맺고 있는 문화의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로 가정 형편이 안되거나 제도권 학교에 정착하지 못한 학생들을 모아 일궈낸 변산공동체학교에선 올해 3명이 졸업해 한명은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두명은 사회에 진출할 예정이다. 어쩌면 그것은 큰 철학을 꿈꾸는 '농부'의 평탄치 않은 인생 역정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책이었던 그의 아버지, 한국전쟁 과정에서 잃어버린 6명의 형, 소주 한병과 오징어 뒷다리를 뒷주머니에 꽂고 다닌 고등학교, 서른네살에 출가해 송광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다 임신한 아내가 아이 손잡고 찾아오자 하산한 일, 그리고 교수직 사퇴….

철학교수들을 대표해 글을 실은 이정호교수는 "존재론을 강단의 것이 아닌 현실의 것으로 되돌리는 그의 통찰에 주목해 후학들이 책을 내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바로잡습니다>

◇3월 3일자 26면 '농부가 된 철학자의 존재론 강의' 기사에서 '충남의 변산 공동체학교'의 '충남'을 '전북 부안'으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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