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전 대통령이 삭제 지시했으면 실무자 처벌 어려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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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회의록(대화록)이 국가기록원에 이관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검찰 수사가 새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더욱이 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문서관리 시스템인 이지원(e-知園)을 그대로 복사해간 ‘봉하마을 이지원’에서 대화록이 삭제된 흔적이 발견되고 국정원 보관 대화록과 똑같은 내용의 대화록(이른바 ‘수정본’)이 확보되면서 실행 주체가 누구인지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2일 검찰 발표의 핵심은 ‘노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이지원에 등재됐던 정상회담 대화록이 누군가에 의해 삭제됐고 또 다른 대화록이 봉하마을에 존재하지만 이 역시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11조에 따르면 대통령기록물은 대통령의 임기 종료 전까지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돼야 한다. 대통령기록물을 무단으로 파기할 경우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이진한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정상회담 회의록은 반드시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돼야 하는 것이며 삭제가 됐다면 문제는 더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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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록 삭제 경위와 관련,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은 지난 2월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에 나와 “노 전 대통령이 이지원의 국가기록원 이관 목록에서 대화록을 삭제하라고 지시해 이를 실무자에게 전달했다”고 밝힌 바 있다. <본지 7월 30일자 1면>

 삭제 지시자가 노 전 대통령이라는 진술이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숨져 검찰은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릴 수밖에 없다. 노 전 대통령의 지시로 삭제를 실행한 실무자를 처벌할 수 있을지도 불명확하다. 수사팀은 “아직 지시자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여러 가능성을 두고 법 적용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말한다. 만약 삭제 지시자가 노 전 대통령이 아니라면 대통령기록물법 위반으로 처벌이 가능하다. 이에 따라 검찰은 당시 청와대 기록물 관리 라인에 있던 인사들을 상대로 조사할 방침이다.

 이지원에 있던 대화록 데이터의 삭제는 이를 청와대의 기록물관리시스템(RMS)으로 이관하기 직전 단계에서 이뤄진 것으로 검찰은 파악했다. 이 때문에 RMS를 그대로 복사해온 대통령기록물관리시스템(PAMS)이나 일부를 선별적으로 복사해온 이지원 소스코드와 데이터 저장매체(NAS)를 아무리 뒤져도 기록물은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봉하마을 이지원은 대화록 데이터 삭제 작업 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화록이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지 않은 배경도 조사의 초점이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의원이나 노무현재단은 지금까지 “대화록은 확실히 국가기록원으로 넘겼다. 이명박정부에서 국가기록원에 있던 대화록이 삭제됐을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검찰 조사 결과 노 전 대통령 시절 해당 대화록은 국가기록원 이관 대상으로 지정조차 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또 봉하마을 이지원에서 대화록 삭제 흔적과는 별개로 대화록 수정본이 남아 있게 된 경위도 파악 중이다. 노무현재단 측은 “최종본(수정본을 지칭)을 만든 뒤 초안을 삭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검찰은 “정상회담 대화록은 봉하 이지원에서 삭제된 것을 복구한 것과 남아 있는 것, 그리고 국정원에 보관한 것 등 세 가지”라며 “이 중 어느 것이 초안인지 수정본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검찰은 복구한 대화록과 남아 있는 대화록은 큰 틀에서는 같고 약간의 차이만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검찰 관계자는 “아침에 일어난 상태에서 눈곱을 뗐느냐, 안 뗐느냐 정도의 구분이라고 보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소 거친 표현들을 순화한 정도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검찰은 이번 주중 자료 열람을 모두 마무리하고 다음주부터 본격적으로 관계자 소환에 나서기로 했다. 김만복 전 국정원장과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 임상경 전 기록관리비서관, 김경수 전 연설기획비서관 등이 주요 소환 대상이다.

 이날 발표에 대해 민주당과 노무현재단이 “정치적 저의가 있다”고 비판하자 검찰은 “검찰 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뿐”이라고 받아쳤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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