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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마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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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강인식
정치국제부문 기자

2002년 겨울. 중앙일보 입사시험 현장평가 둘째 날. 이미 몇 차례 관문을 통과한, 그래서 더 절실해진 응시생들 앞에 한 평가위원이 나타나 화이트보드에 ‘MARKET’이라고 적었다. 그러곤 “자, 이제 현장으로”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시장에 대한 르포를 하라는 건가. 몇몇에게 전화를 걸어 막막함을 토로했더니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 대학생들이 캠프 마켓(Camp Market) 담을 넘었잖아.”

 인천시 부평구에 있는 캠프 마켓. 내가 커온 동네의 미군부대. 어린 시절 마켓은 하나의 자연 조건이었다. 부대로 끝없이 이어지는 철길에서 여름엔 개구리를 잡고 가을엔 잠자리를 쫓았다. 어른들은 부평의 술집과 상점이 부대 정문으로부터 생겨났다고 했다. 한쪽엔 옐로하우스도 있었다. 사춘기의 간질간질한 춘기(春期)가 발동할 때면 그곳에 몰려갔다. 곁눈으로 본 여자의 속살은, 그것이 겨우 허벅지뿐이었지만 우리에겐 충분했다. 마켓의 정문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가지를 부평 사람들은 신촌이라 불렀다.

 마켓은 지형적으로 부평을 반으로 갈라놨다. 직선으로 걸어서 10분 거리였지만 마켓을 사이에 두고 현대백화점과 씨티백화점이 들어섰다. 큰 아파트단지인 현대아파트와 동아아파트가 부대를 사이에 두고 지어졌다. 여의도공원 면적 두 배인 44만㎡의 마켓은 그렇게 부평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점유하고 있었다. 아파트 고층에 사는 친구 집에 가면 겨울에도 새파란 양잔디가 깔린 생경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군속의 자녀는 학교에 미군 PX물건을 가져오기도 했다. 마켓은 못 먹던 시절 부평의 상권에 기여했으나 부평이 더 번창해지자 지역의 발전을 가로막는 존재가 됐다.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마켓에 대한 기억이 비로소 정리되기 시작했다. 평가과제인 MARKET을 캠프 마켓으로 풀 수 있을 거 같았다. 나는 동네로 갔다. 신촌의 중심인 마켓 정문은 사라지고 없었다. 미군이 정문에 벽돌을 발랐다. 전경버스가 부대를 둘러싸고 있었고, 경찰은 나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2002년 그해엔 월드컵이 있었고 효순·미선이가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했다. 대학생들은 미군부대 담을 넘다가 잡혀가기를 반복했다.

 마켓은 일제시대 조병창(병기공장)이었다. 매일 소총 4000정, 총알 70만 발이 만들어졌다. 1951년 조병창은 미군에 공여됐다. 인천항과 가까워 보급부대(마켓)가 들어섰다. 그곳은 한번도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2002년 시위가 커지자 미군 사령관은 우리의 국민성을 언급했다. 오키나와 미군의 범죄가 발생하자 주일 미 대사가 다다미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게 부러웠었다. 2013년 미군의 범죄에 사령관은 무릎을 꿇진 않았지만 엄중히 사과했다. 최근 인천시는 마켓 부지에 대한 관리 계획을 발표했다. 마켓은 평택으로 이전한다. 2017년 그곳은 처음으로 우리의 것이 된다. 내 아이는 철길과 옐로하우스를 모를 것이고, 44만㎡의 공원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강인식 정치국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