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 일으키는「참여」·「순수」 양분론 없어야|박남수<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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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 달부터 「시월 평」을 담당하게 되었다. 딴 시인들의 작품들을 한 달 치씩 모아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즐거운 일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나처럼 소심하고 대단히 모범적(?)인 사람에게는 즐겁기는커녕 어깨가 무거워 큰 곤혹을 느끼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월평을 맡게된 것은 우리 시작품들을 이런 기회라도 아니면 넓게 읽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남의 작품을 단정적으로 평가할 생각은 없고, 다만 한 독자로서 소감을 적어갈 생각이다.
요즘 우리시단에서는 시에 대한 성찰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월평 따위를 제외하고 시인론 등 꽤 귀를 기울일 만한 연구가 발표되고 있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아직도 한구석에서 시의 근원적인 문제보다는 지엽적인 문제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딱한 것은 시인들을 갈라 「참여」파니 「순수」파니 하고 양분하여 대립 상을 조성하려는 일부 비평가·시인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 시인은 「참여시」다, 「순수시」다 하면서 「레테르」를 붙이고 작품을 창작하지는 않는다. 그저 「시」를 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시인이 「참여」도 「순수」도 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지 어느 하나만 고집하는 것은 오히려 「시」를 버리고 있다는 증좌에 불과하다.
이 달치 잡지에서 그런 예를 하나 들어볼까 한다.
김현승은「신동아」에 『다형』이란 작품을, 그리고 「창작과 비평」에 『사실과 관습』외 4편 등을 발표하여 가장 양적으로 많은 작품을 생산한 시인이다. 그의 작품을 조금 분류해 보면 『사실과 관습』 『보전』『아버지의 마음』등 3편은 인생 적인 술회를 써내려 갔고 『사탄의 얼굴』 『누가 나의 참 스승인가』등 2편은 뭣인가 이야기하고 싶어서 쓴 작품이고, 『다형』은 계절적 감이 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다룬 작품이다.
이런 분류에 작자는 반발할는지도 모르겠으나 한 시인이 여러 「타입」의 작품을 거의 같은 무렵에 생산하고 있다는 것만은 이 한 예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인을 양분론 자들은 어디에 소속시키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6편의 작품 가운데 비 참여적인 『다형』이 가장 「어필」했다고 느꼈다.

<광야의 맑은 머리와, 단식의 깨끗한 빈속으로, 가을이 외롭지 않게 차를 마신다>는 시구에는 아무런 강요도 주장도 없다.
부담 없이 한 작품을 읽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이 강요도 주장도 없으면서 우리에게 계절의 추이를 느끼게 하는 것은 이 시인의 만만찮은 언어의 동금술을 구사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사실과 관습』을 보면 <내가 좋아하는 차를 마신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사실일 뿐, 차의 짙은 향기와는 관계없이 물과 같이 담담한 뿐이다>는 구절은 『다형』처럼 담담하지가 못하다. 긴 주석을 단 서술이 가시처럼 걸리어 쾌적하지 못한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다시 주장을 내세운 『누가 나의 참 스승인가』를 보면 이 작품의 주제는 <우리의 어린것들을 우리는 아무에게나 바칠 수 없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예를 들어 바치기를 소리 높여 거부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어린것들을 두 손 모아 바칠 것>이란 대목이 대단히 불투명하여 이 작품의 의도를 완전히 뒤엎은 것 같다. <호올로 거칠은 파도를 헤치고 외로운 섬 마을을 향하여 이승의 노를 저어 가는 반짝이는 등대 앞에i사랑의 앞에 우리는 우리의 어린것들을 두 손 모아 바칠 것이다!>고 외치고 있지만 앞서의 거부가 구체적인 실증을 나열하였던데 비하여 이것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비유적(?)이어서 사랑하는 어린것들을 두 손 모아 바친다는 것이 목소리에 비하여 너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여기가 불투명했기 때문에 그 뒤를 잇는 연들에서 내세운 것들이 더욱 미궁으로 몰아져가 고 있는 듯하다.
-이상, 같은 시인의 거의 같은 무렵의 작품들이 이렇게 그 모습을 달리하는 예는 드물기는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또 작자의 의도에 불구하고 작품의 성패는 스스로 결정된다.
그러므로 나는 할 일없는 일부 비평가나 시인들 이 부질없이 「참여」 「순수」를 양분할 필요도 없고, 또 그것이 그 어느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작품이 우위에 있는 듯이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가령 이백이가 두보 만큼 현실을 다루지 않았다고 해서 이백의 작품을 저질의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 또 백낙천의 시가 참여시가 많았다는 이유로 이백·두보·왕유 보다 훌륭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참여시의 내용이 더 예리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고 그 형식이 논의되는 것이 보다 더 시의 문제에 가까울 것 같다. 양분론으로 영일 없는 것은 참여의 본의에서 어긋날 뿐만 아니라 시를 저해하는 일이 될 듯하다.
주어진 지면이 다 되었다. 이 달에는 「현대시학」에 <강림·이승철의 야심작이 5편씩이나 묶여졌지만 언급을 못한다. 김후란(월간 중앙) 허만하(신동아) 신동집(현대문학) 의 작품도 읽을 만 하였지만 역시 할애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감이다.
※「이달의 소설」은 대부분의 11월 호 잡지들이 노벨상 수상작품 게재관계로 창작 소설을 싣지 못하고 있어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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