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 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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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642년에 일어난 영국의 혁명을 흔히 「크롬엘」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청교도 혁명이라 부르는 사가도 있다. 그런가하면 시민혁명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사람과 시각에 따라서 이렇게 풀이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영국혁명의 경우는 그 성격규정을 더욱 까다롭게 만든 일이 있었다.
혁명 초에는 의회파와 왕당파 중 어느 쪽이 이길지 점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어느 쪽엔가에 모든 귀족이 가담해야했다.
부자가, 또는 형제가 서로 의논하여, 각기 다른 군기 밑에 달려간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 이기건 가통만은 지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쓰라린 과거를 갖고 있는 영국민족의 특권은 그러면서도 전통적으로 장남만이 계승한다. 따라서 차남이 하는 「스콰이어」(Squire)란 칭호만 받을 뿐, 생계를 위해서는 딴 도리를 취해야만 했다. 이것이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귀족의 수를 제한해 나가는데 도움이 됐다. 우리나라에선 양반의 자식은 모두 양반의 특권을 누리기로 돼있었다. 물론, 3대째 벼슬을 못하면 그냥 사가가 되어버리기는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벼슬싸움만 더욱 치열해졌다. 양반의 수는 자꾸자꾸 늘어가는데, 감투의 수는 한정돼있기 때문에, 당쟁이 일어났다고 보는 사가도 있다.
영국의 귀족이나 한국의 양반이나 모두 가문에 대한 애착과 자랑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네 양반의 문중의식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문중에 기대어 있어야만 살 길이 난다는 의식과 관련된 의타근성이 뿌리 박혀 있다.
그러기에 당쟁이 없을 때는 문중끼리의 싸움이 빈번했던 것이 우리네 양반사회의 모습이었다.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도 양반은 없어졌다. 양반의식도 없어졌다고 봐야 옳다. 그러나 문중의식은 여전하고, 문중 싸움도 여전한 모양이다.
옥산서원의 허위 고서도난 신고사건도 결국은 문중싸움의 한 형태로 빚어진 것이었다는 혐의가 굳어졌다. 분명 서원은 문중가운데 뛰어난 한 조상이 만든 것이며, 문중의 자랑스러운 소산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와서는 동시에 우리민족 전체의 귀중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만일에 이기적인 문중의식만 아니었다면 이런 사건은 애당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근대화에 있어 제도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들의 의식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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