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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빚 증가 → 소비 위축 → 경기 침체 … 한국도 '일본 20년'과 비슷한 경로 밟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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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99년 3월 일본의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내각은 획기적인 내수 진작책을 발표했다. 15세 이하 자녀를 둔 저소득층 가구주 3500만 명에게 총 7000억 엔에 달하는 ‘지역진흥권’(상품권)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6개월 이내에 상품권을 쓰도록 유효기간도 설정했다. 2009년에도 일본 정부는 1인당 1만2000엔, 총 2조 엔(당시 환율 기준 30조원) 규모의 현금을 국민들에게 직접 나눠줬다. 17조9000억 엔 규모의 공공·재정사업, 6조 엔 규모의 감세정책 등을 총동원했지만 끝내 민간소비가 살아나지 않자 내놓은 ‘고육책’이었다.

 상품권 지급 정책은 시행 초기에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99년에는 ‘현금 뿌리기(바라마키)’라는 유행어를 낳기도 했다. 2009년에는 세이부·쇼고 등 백화점들과 이토요카도·다카시마야 등 유통업체들이 ‘1만2000엔 상품’ 마케팅을 했다. 여행사들도 앞다퉈 1인당 1만2000엔짜리 관광상품을 판매했다.

 하지만 상품권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일시적인 효과를 제외하고는 소비자들이 지출을 여전히 억제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세율 인상도 한몫했다. 97년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내각은 소비세(부가가치세) 세율을 3%에서 5%로 올렸다가 소비 회복세에 찬물을 끼얹은 바 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제는 90년대 내내 ‘기업 수익 감소→설비·고용 축소→소비 감소 확대→물가 추가 하락 및 기업 수익 감소’라는 전형적인 디플레이션을 겪었다.

문제는 우리나라도 일본과 비슷한 경로를 겪고 있다는 점이다. 가계부채가 늘어나는 가운데 한국도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마찬가지로 보유 주식이나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면서 개인의 소비심리가 위축되는 ‘역(逆)자산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도 우리나라는 164%로 일본(132%)뿐 아니라 미국(120%),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36%)보다도 높다.

강중태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일본은 버블 붕괴 직전 4년(1986~ 89) 동안 연 평균 12.2%씩 가계부채가 증가하면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중이 68.9%에서 84.1%까지 높아졌다”며 “1000조원에 달하는 가계부채 규모로 볼 때 한국 경제도 일본형 소비침체의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최지영·박태희·구희령·김영민 기자, 신혜진 인턴기자(고려대 영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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