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명품관 "보름간 200만원대 핸드백 1개 팔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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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1시 서울 A백화점 명품관. 일요일 오후인데도 복도가 텅 비었을 정도로 한산하다. 모퉁이를 돌자 B브랜드 매장 앞에 서너 살쯤 돼 보이는 딸을 데리고 온 젊은 아빠가 보였다. “자, 요 앞에 서 봐. 마네킹 안녕~.” 쇼윈도 앞에서 연신 사진을 찍던 아빠는 정작 매장은 들어가지 않고 딸의 손목을 잡고 돌아섰다. “자, 이제 우리 삼각김밥 먹으러 가자~.”

 오후 2시 C브랜드 50% 특설코너. 행사상품으로 빽빽한 좁은 코너에 직원만 네 명이 배치돼 있지만 손님이라곤 기자뿐이다. 직원 두 명이 한꺼번에 다가와 “제품 한번 입어보시겠어요”라고 권했다. 오후 2시30분 D브랜드 매장. 1시간여 동안 오가며 지켜봤지만 드나드는 손님이 보이지 않는다. 매장 직원은 “오전 10시30분 문을 연 이후 지금까지 매장에 들어온 손님이 한 명도 없다”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제 2주 만에 처음으로 200만원대 핸드백 한 개를 팔았다”며 “매출이 떨어져서 다들 걱정”이라고 말했다.

 백화점 명품관이 고전하고 있다. 중산층도, 부자도 명품 매장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A백화점 최상위 1% 고객의 올 4~6월 명품 소비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5.3% 줄었다. 고급 가전제품 매출도 26% 감소했다. 불황으로 인한 소비 위축 분위기 속에서 남의 눈에 확 띄는 명품 패션이나 최고급 가전 등을 구매하기를 조심스러워한다는 것이다. 백화점 최상위 고객의 쇼핑을 일대일로 도와주는 ‘퍼스널 쇼퍼’들도 ‘눈치 보는 부자들’의 모습을 전했다. E백화점의 퍼스널 쇼퍼는 “예전처럼 보석 등 고가품을 살펴보다가도 ‘요즘 같은 분위기에 내가 이런 걸 사도 되겠느냐’고 내려놓더라”고 말했다. F백화점의 퍼스널 쇼퍼는 “미리 카카오톡 등을 통해 신제품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받아본 뒤 마음에 드는 제품이 있으면 매장에 나오는 식으로 백화점 출입 자체를 삼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한 전자업체는 1500만원짜리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를 출시 한 달여 만에 990만원으로 내렸다.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서라는 명목이었지만 유통업계에서는 실제로는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A백화점 관계자는 “정부의 고강도 세무조사 등 아무래도 부유층이 돈을 쓰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에 VIP 고객의 식품 소비는 15.2% 늘었다. 부자들이 눈에 띄는 명품 대신 티내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최고급 식품 등으로 눈을 돌렸다는 것이다. F백화점 퍼스널 쇼퍼는 “예전에는 거의 100% 패션 명품 문의만 있었는데 요즘은 100g에 1만5000원 하는 고급 소금이나 수십만원씩 하는 방향제처럼 ‘나 혼자 즐기는 명품’ 문의가 20~30%는 된다”고 말했다.

세종대 유통산업학과 전태유 교수는 “경기가 나빠지면 돈이 있는 사람도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아 돈을 못 쓰게 되는 분위기로 흐르기 쉽다”고 말했다. 그는 “고소득층이 소비를 해줘야 경기가 활성화된다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지 않으면 결국 해외로 가서 소비하게 되고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김찬구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총수요 부진이 이어지면서 국내 경제는 디플레이션 초입에 진입했다”며 “주택거래 정상화, 투자 수요 확충을 위한 규제 완화 등으로 디플레이션 악순환을 막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특별취재팀=최지영·박태희·구희령·김영민 기자, 신혜진 인턴기자(고려대 영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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