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자도 중산층도 '소비 빙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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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서울 논현동 수입가구 거리. 이 일대 가구점 20곳을 돌아봤지만 손님이 있는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그나마도 가게 내 테이블에서 직원 설명을 들으며 카탈로그를 넘기고 있을 뿐 적극적인 구매 의사가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인근 또 다른 가구매장은 3층짜리 가구점에 직원이 4명인데 손님이 없어 모두 그냥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었다. 점장 김모씨는 “이탈리아 수입 소파가 주력 상품이지만 예전보다 20~30% 덜 팔린다”며 “그나마 팔리는 건 할인행사를 하는 진열품 정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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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백화점은 최근 매출 상위 1%인 최고등급 VIP 회원들의 쇼핑 실적을 뽑아보고 깜짝 놀랐다. 올 1분기엔 전년보다 7.9% 줄었다. 하지만 세무조사와 부자 증세 분위기가 본격화된 2분기엔 무려 11.9%나 줄어들었다. 최고 VIP들의 매출이 두 자릿수로 줄어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백화점 관계자는 “특히 세무조사 등으로 사회 분위기가 안 좋아진 2분기부터는 가구와 대형 가전 등 이웃의 눈에 띄는 제품의 구매를 줄이는 분위기가 뚜렷하다”고 말했다.

 부자들만 움츠러든 것이 아니다. 중산층 소비자들의 실속 소비로 승승장구하던 중저가 화장품 역시 최대 50% 할인에 나섰지만 여름세일 매출은 지난해보다 10∼20% 감소했다. 미샤를 운영하는 에이블씨엔씨는 올 2분기 20억8800만원의 영업손실을 봤다. 이 회사가 영업손실을 기록한 것은 2007년 4분기 이후 5년여 만에 처음이다. 중저가 화장품 업체들은 외환위기의 대표 수혜자로 꼽힌다. 지난해 국내에서 불황이 본격화되면서 백화점 화장품 매출이 줄어드는 속에서도 상승세를 이어가던 이들조차도 최근 소비 한파를 피해가지 못한 것이다. 중산층 가족들이 외식할 때 주로 이용하는 한 패밀리레스토랑 업체는 이달 들어 매출 성장률이 한 자릿수로 꺾였다.

 한국은행은 최근 올 2분기 국내총생산(GDP)이 1.1% 증가해 9분기 만에 성장률 0%대를 탈출했다고 발표했다. 이를 바탕으로 정부는 경기가 살아날 기미를 보인다고 낙관하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다르다. 부자들은 눈치가 보여 안 쓰고, 중산층은 없어서 못 쓰는 ‘소비의 빙하시대’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신헌 롯데백화점 대표는 “과거 외환위기나 카드대란이 소나기였다면 지금은 장마와 같다”고 우려했다. 시장조사업체 닐슨글로벌의 2분기 전 세계 소비자 신뢰지수 조사에서도 한국은 51로 최하위권이었다.

 소비 빙하기의 주요 원인은 가계부채다. 한국의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64%로 일본의 132%, 미국의 120%보다 훨씬 높다. 가계부채 규모도 지난해 말 기준 1099조원에 달한다. 얼어붙는 소비심리도 한몫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소비는 심리인데 이 심리를 살릴 동인이 안 보인다”고 입을 모았다. 오정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 상황은 수요 위축에 따라 물가가 떨어지는 전형적인 디플레이션 상황”이라며 “방치하면 일본식 ‘잃어버린 20년’으로 갈 수 있다는 심각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최지영·박태희·구희령·김영민 기자, 신혜진 인턴기자(고려대 영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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