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김찬삼 여행기<인니 제9신>|천둥속의 무서운「스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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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자카르타」에서 며칠을 보낸 다음 유명한 열대식물원이 있는「보고르」로 향하였다. 「버스」를 타고「자카르타」시가를 빠져나가 아름다운 자연속을 얼마쯤 달리고 있을 때였다. 먹구름이 덮이는가 하더니 하늘이 어두워지며 눈부신 번갯불이 번쩍이며 천둥까지 요란하게 쳤다. 열대의「스콜」의 생리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늘 따라 치는 요란한 천둥은 어찌나 큰지 하늘이 쩡쩡 울렸다. 누군가가 노래한 것처럼 천둥은 태고시대를 불러 일으키는「팀파니스트」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번갯불이 번쩍이고 천둥이 요란한데 벼락이라도 떨어지지 안나하는 두려운 예감까지 들기도 했다. 원시적인 만큼 강력한 위세로 비가 쏟아졌다. 여러번 소나기를 맞았지만 이번처럼 무서운 비는 처음이다. 제2의「노아의 홍수」라도 되지 않을까 할만큼 삽시간에 길이 물바다가 되고「버스」안까지 물이 들어왔다. 이 지방은 이런 무서운「스콜」이 자주 오기 때문인지 집이란 집은 모두 한길이나 넘도록 말뚝을 박아 세운 그 위에 다마루를 깔고 원두막 처럼 지었다.
비는 억수같이 퍼붓고 홍수처럼 물이 넘쳐「노아」의 방주라도 만들어야 할 판인데 길가의 마을에 사는 어린이들은 모두들 알몸뚱이가 되어 즐겁게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버스」는 물론 달릴 수 없어 길가에 멎어있는데 사, 오십만에 비가 감쪽같이 멎고 하늘이 개기 시작하였다.
「버스」는 다시 달렸다. 구름 틈으로 보이는 열대의 그 푸른 하늘빛은「사파이어」와도 같이 더욱 맑아 보인다.
이런 열대에선「스콜」이란 없어서는 안 된다. 무더위를 덜어줄 뿐 아니라 물뿌리개 처럼 숲에 물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스쿨」이란 자연현상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조화를 부리는 하늘의 은총이다.
「괴테」는 신은 이 지상에 편재한다고 말했지만 고맙게도 작훈하는 태양아래 만들어주는 이 최상급의 냉방장치! 이뿐 아니라「스콜」은 더러운 것들을 말끔히 씻어 내리게 하는 유일의 세척제이기도 하다.「버스」는 가로수가 우거져「터널」처럼된 언덕진 도로를 달리는데 사탕수수밭이며 야자림이며 원시림이 펼쳐졌다. 오른쪽엔「살라크」, 왼쪽엔「게테」의 원추식화산이 가까워지는가 하더니 인구 15만이라는「보고르」에 이르렸다.「자카르타」는 찌는듯이 더웠는데 이곳은 삼복이 지난 우리나라 아침저녁 처럼 쌀쌀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높은 지대에서 기후의 수직적인 변화에서 오는 현상이다.「보고르」에 닿은 것이 저녁이어서 곧 소개받았던 숙소에 들었는데 꽤 큰 화란식「호텔」이었다.
그런데 이「보고르」란 곳은 이 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보이텐조르크」(자연이 아름답다고 무우경이란 뜻으로 지은 이름)라고 했는데, 내가 중학시절부터 동경해 오던 곳이다. 오랜만에 그리던 님을 만난 것 처럼 다정스러웠다.
여기에는 18세기 중렵에 화란총독이 지은 으리으리한 궁전이 있는데 역대 총독의 관저로 쓰이었고 이 나라의 독립후에는 대통령 관저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넓은 잔디밭에 서 있는 나무그늘에는 뜻하지 않은 사슴떼들이 보이기에 이 나라에도 이런 사슴이 있는가 하고 알아 보았으니 일본이 점령하고 있을 때 갖다 기르는 것이라고 한다. 사슴이 놀고 있는 광경은 매우 목가적이고 평화스러웠다.
이곳은 1954년「콜롬보」회의가 열린 곳인가 하면 1955년「아시아·아프리카」회의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이「보고르」란 곳은「자바」에서 으뜸가는 백인 거주지역으로서 넓은 잔디밭에 둘러싸인「네덜란드」식 옛집이 이국적인 정서를 풍긴다.
이곳엔「보고르」식물원을 보려고 왔는데 공교롭게도 지난 정월초에 폭풍으로 식물원이 많이 파괴되어 수리하고 있기 때문에 입장금지라는 것이었다.
자세히 알아보니 어떤 외국의 어떤 고관도 여기왔다가 사절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겐 「자카르타」에 있을 때 이미 받아둔 식물원 의사의 소개장이 있어 방문형식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기는 했지만 숙소에 가서 자리에 누웠으나 적이 걱정되어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 이튿날 식물원을 찾으니 아쉽게도 장본인은 어디 출장가고 없었다.
마침 직원이 반기며 원장을 소개해 주었다. 일생동안 그리던 이 식물원을 찾아왔는데 어떻게 넣어달라고 신신부탁을 하니까, 하도 측은하게 보였던지『그럼 비공식이지만 특별히 넣어 드리리다. 그 대신 아무한테나 내가 넣어 주었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하며 쾌히 승낙해 주었다.「좁은 문」으로 홀로 들어가는 셈이었다. 식물원 문밖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천국도 이렇게 들어가는 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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