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불가피한 증세라면 솔직히 고백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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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번 세법개정안에 우리 사회가 뿔난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증세를 해놓고 청와대와 정부가 “증세가 아니다”며 우기기 때문이다. 국어대사전에 증세는 ‘세금 액수를 늘리거나 세율을 높임’으로 정의돼 있다. 세액만 늘어나도 증세는 증세다. 이런 상식을 무시하고 엉뚱한 해명만 늘어놓으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둘째, 고질적인 징세 편의주의다. 이번에도 원천징수를 통해 앉아서 거둬들이는 월급쟁이의 소득세만 올렸다. 불쾌지수가 치솟는 건 당연하다.

 증세는 모처럼 마주하는 예민한 사안이다. 우리는 소비세 도입(1977년) 이후 제대로 증세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조세부담률은 오랫동안 20% 선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증세 외의 대안을 찾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미 상반기에 10조원의 세수가 펑크 났다. 이대로 가면 내년에 다시 대규모 적자 국채 발행은 불 보듯 뻔하다. 올해 초엔 이명박정부에 덤터기를 씌우며 무사히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다. 하지만 내년의 적자 국채는 고스란히 현 정부의 책임이다. 후세대에 빚을 떠넘기고, 재정 건전성을 해친다는 비난을 어떻게 감당할지 의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세법개정안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조치다. 하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박 대통령이 풀어야 한다. ‘증세 없는 복지’의 족쇄에 갇혀 있는 한, 어떤 묘수도 국민을 납득시키기 어렵다. 대통령의 솔직한 대국민 해명으로 출발해야 한다. 동시에 어느 어느 복지는 더 미룰 수 없으니 증세를 설득하는 수순을 밟아 가야 한다. 더 이상 “증세가 아니다”며 둘러대기보다 정면돌파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미 ‘중(中)부담-중복지’는 시대적 대세다. 우리 사회도 일정한 부담 증가는 피할 수 없다.

 새누리당은 대통령의 ‘원점에서 재검토’를 부분적 손질로 오해하는 모양이다. 소득 5000만원 이하의 세 부담을 낮추는 땜질식 처방으로 넘어가려는 분위기다. 하지만 납세자의 분노와 오해를 가라앉히려면 보다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내년 세출부터 과감하게 감축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 일부 복지 공약까지 용기 있게 내던져야 증세에 앞선 최소한의 예의라 할 수 있다.

 그 다음,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증세에 대한 사회적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우선 복지 재원 부담을 어떻게 증세와 적자 국채로 나눌지가 중요하다. 경기 상황을 감안하면 적자 국채 발행이 보다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소득세·법인세·소비세의 균형을 맞추는 데도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이번에도 손쉬운 소득세만 올렸다가 역풍을 맞았다. 납세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달래줄 방안도 찾아야 한다. 고소득 전문직의 과세를 강화하고, 종교인에 대한 과세도 시작해야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다.

 세금은 경제 문제이자 동시에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다. 역사적으로 세금을 올리다 정권이 무너진 사례는 흔하다. 질서 있는 증세로 나라를 되살린 경우도 적지 않다. 증세만큼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한 사안은 드물다. 박 대통령이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고 증세 논의의 물꼬를 터야 한다. 정치적 위험을 의식해 새누리당과 정부에만 맡길 수준은 지났다. 납세자들의 오해만 깊어 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