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유리 지갑 털어 복지 재원 마련할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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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근혜정부의 첫 세제 개편안이 나왔다. 세제 개편안은 정부의 향후 정책 방향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다. 이번 개편안은 특히 ‘증세 없는 복지’를 약속한 박근혜정부의 정책 의지를 확인할 첫 관문이란 점에서 주목을 받아 왔다. 과세 형평성, 경기 활성화, 지하경제 양성화를 촉진하는 방향은 물론 복지 재원 마련과 재정 건전성 확보란 상반된 목표 달성 방안까지 어느 때보다 많은 주문이 담겼던 것도 그래서다

 어제 뚜껑을 연 개편안의 큰 가닥은 무난한 편이다. 특히 과세 형평성을 강화한 것은 시대 정신과 맞는 방향이다. 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더 걷어 서민을 지원하고 대기업보다 벤처·중소기업에 세제 혜택이 많이 돌아가도록 했다. 부문별 세부담은 고소득자와 대기업이 2조9700억원 늘어나고 서민과 중소기업은 6200억원 줄어든다. 가장 큰 변화는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꾼 것이다. 고소득자가 더 많은 세금 혜택을 받는 ‘역누진 효과’를 바로잡겠다는 의미다. 이렇게 되면 연간 근로소득 3450만원이 넘는 근로자 434만 명은 세부담이 1조3000억원 늘어난다.

 몇몇 오랜 논란거리도 잘 정리됐다. 재산세는 거래세를 낮추고 보유세를 높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집값 상승 신화가 끝난 만큼 진작 갔어야 할 방향이라고 본다. 종합부동산세를 지방세로 전환하는 방안은 취득세 인하와 맞물려 있는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종교인과 연소득 10억원이 넘는 부자 농민에 대한 과세도 바람직한 방향이다. 종교인과 부농(富農)은 오랫동안 과세 사각지대에 있으면서 ‘소득 있는 곳에 과세 있다’는 국민 개세주의의 예외가 돼 왔다.

 우려도 없지 않다. 당장 중·고소득 월급쟁이들의 불만과 조세 저항을 부를 수 있다. 고소득자가 어디 월급쟁이뿐인가. 변호사·의사 등 세원 파악도 잘 안 되는 고소득 자영업자가 널렸다. 한국납세자연맹은 “지하경제에 속하는 자영업자는 두고 꼬박꼬박 세금 내는 유리 지갑을 털어 복지 재원을 마련하는 것은 형평에 맞지 않는다”며 어제부터 근로소득자 증세 반대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시행시기를 조절하는 등 근로소득자의 세금 충격을 줄여주는 섬세한 조정이 필요하다.

  복지 재원 마련을 위한 세입 기반 확충이 크게 미흡한 것도 문제다. 이번 세법 개정을 통해 더 거둬들이는 돈은 2017년까지 약 2조5000억원 정도다. 공약 가계부의 국세수입 48조원에 턱없이 모자란다. 그렇다고 국세청의 노력 세수를 통해 부족분을 메우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정부는 이번 중장기 조세 정책 방향에 현재 20.2%인 조세부담률을 2017년 21% 안팎으로 조정해야 한다며 증세 여지를 남겨놓았다. 정부 스스로도 한계를 인정한 만큼 ‘증세 없는 복지’ 구호에만 매달릴 때가 아니다. 공약 재조정에서 증세까지, 복지 재원 마련 방안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