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 지난 아버지의 가출 …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손홍규의 ‘그 남자의 가출기’에는 관계의 공허감이 가득하다. 작가는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면 다른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손홍규(38)의 소설집 『톰은 톰과 잤다』(문학과지성사)에 실린 작가의 말에 이런 부분이 있다.

 “한 편의 소설을 쓰는 일은 눈을 뜬 채 지독한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해서 아직 동살이 잡히지 않은 새벽녘 나는 참 많이도 홀로 쓸쓸했다. 삶은 늘 그 시각에 머문 듯했고 소설은 언제나 멸망직전이었다. 전멸하지 않기 위해 사투를 벌였으나 무엇과 그토록 싸워왔는지 알 수가 없다. 고단하다.”

 단편 ‘그 남자의 가출기’ 속 주인공의 심사도 비슷하다. 쓸쓸하고 고단하다.

 예순셋의 남자가 갑자기 흔들린다. 마음을 뒤흔들 매혹적인 달빛도 없는 데, 유서 깊은 듯한 슬픔에 사로잡혀 남자는 홀연 집을 나선다. 가출이다. 이유는 있다. ‘나는 뭐지’란 질문 때문이다. 주인공의 입을 빌리자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나이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맞닥뜨린 질문”이었다.

 “주인공은 평생 농사를 지으며 60년 넘게 불안을 자기 안에 갈무리하고 살다가 갑자기 깨닫는 거죠. 근원적이며 존재론적인 불안을. 그 불안의 기원을 찾아 여행을 떠나죠.”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론 회의는 ‘대파를 심었는데 양파가 난’ 사건을 통해 은유적으로 반복된다. 어느 날 아내가 묻는다. “대파를 심었는데 왜 양파가 났을까”.

 남자는 생각한다. ‘대체 무얼 심었기에 내가 된 걸까’라고. 자식을 볼 때마다 자신이 수많은 결과의 원인이라는 생각에 분노도 치민다.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데,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난 셈이에요. 내가 뭘 심고, 어떤 씨를 뿌렸기에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지금의 내가 됐는지 되돌아보는 거죠. 결국 자기 안에서 해답을 찾아야 해요. 관계의 결핍에서 생겨난 불안을 표현하기도 하고요.”

 오랜 시간 살을 맞대고 살아왔지만 남자는 아내가 다르게 늙어간다 느낀다. 가장 가까이 있음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인 셈이다. 남자는 아내가 수박을 좋아한다고 기억하지만 정작 아내는 참외를 좋아하듯, 두사람은 서로 빗나가기만 한다.

 “관계는 기억에 의존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연이 쌓이고 정이 쌓이고 관계가 되는 거죠. 사연은 희생이 있어야 하고, 애틋해지는 데 우리 시대는 평범한 의미의 기억도 쌓이지 않는 듯해요. 희생하지 않고 시간만 쌓고 경험만 공유하는 건 본질적 의미의 기억은 아니죠. 그래서 생각보다 관계가 허약할 수 있는 듯해요.”

 불현듯 시작된 가출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정체성을 잃어간다.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처럼 집 주위를 떠돌며 농사를 챙기고, 집에 스며들어 ‘도둑’처럼 가재도구와 음식도 들고 간다. “떠나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문제가 비롯된 곳에서 살아온 삶에서 살아가면서 해결하려는 거죠.”

 예심위원인 문학평론가 조연정씨는 “노년의 인물이 삶에 대해 느끼는 허무가 분노의 감정과 뒤섞이는 지점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가출이라는 일탈이 일상으로의 회귀로 귀결되는 유머러스한 장면이 따뜻하게 읽힌다”고 평했다.

 요즘 그의 작품에는 가족 이야기가 많다.

 “요즘은 불안을 과식한 시대에요. 현대인은 존재에서 비롯된 근원적 불안이 아니라 학습된, 혹은 강요된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 생긴 불안을 겪고 있죠. 가족은 그런 근원적 존재의 불안과 강요된 욕망이 뒤섞여 나타나는 공간이고, 사회 관계의 축약이며 은유이기도 하니까요.”

글=하현옥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손홍규=1975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 『사람의 신화』 『톰은 톰과 잤다』. 장편 『귀신의 시대』 『이슬람 정육점』. 오영수문학상·백신애문학상 수상.

관련기사
▶ 눈을 떴다고 보는 걸까 낯선 내면과 마주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