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고 보는 걸까 낯선 내면과 마주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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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하 시인은 지난해 시집 『모조 숲』을 엮으면서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에 다다랐고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해 팔목에 고양이 문신을 새겼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고통을 전시하는 이민하(46) 시인의 시는 줄곧 쓸쓸했다. 그런데 이번 미당문학상 예심위원들은 그의 시에서 ‘유머’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삶의 아이러니를 포착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언어유희가 돋보이는 ‘백치 바나나’ 같은 시가 그렇다. 시인은 ‘처음 만난 바나나에게 손을 내민다. 바나나가 손을 내밀 순 없으니까’라며 ‘백치 같은 이 저녁을 아다다라고 부를 수 없듯이’라고 노래한다.

 또 소시민(小市民)을 소시민(小詩民)이라고 비튼 시는 어떤가. ‘나는 오글거리는 두 손으로 시 한 줄 써줄게’라며 시를 시작한다. 시인도 유머가 더해졌다는 평에 동의했다.

 “예전엔 관계 그 자체만 들여다보고 묘사했어요. 지금은 한 걸음 떨어져서 관계를 둘러싼 배경을 더듬어보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시에 농담을 섞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거죠.”

 변화는 어디서 시작됐을까. 그는 길고양이를 키우면서 닫혀있던 마음에 애정을 나눌 수 있는 틈바구니가 생겼다고 말한다.

 “길을 걸을 때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어요. 낯을 많이 가렸죠. 그런데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면서 사람과 부딪치는 일이 계속 생기더라고요. 왜 밥을 주느냐며 시비 거는 사람을 설득해야 하고, 예쁘다고 사진을 찍거나 간식을 챙겨 나오는 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누기도 하고요.”

  시인의 시는 삶과 한 몸이다. 그러니 삶이 꺾이는 지점에서 시도 꺾인 것이다. 그의 시가 변하지 않는 지점이라면, 누구에게도 영향받지 않는 독창성이다.

 지난해 미당문학상 수상자이자 올해 예심위원을 맡은 권혁웅 시인은 “젊은 시인들은 대개 문장이나 주제에서 선배로부터 학습받은 흔적이 보이는데, 이민하 시인은 첫 시집부터 안 보였다. 그만큼 개성이 확실하다”고 설명했다.

 이 시인은 “기억력이 나빠서 흉내 낼 수가 없다”고 웃으면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4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대가족 안에서 겉돌았고 그림을 그렸던 아버지의 고독을 닮아 혼자서 사색하는 시간이 많았다. 저절로 남들이 보지 못한 것, 소수의 감정, 비주류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이번 후보작인 ‘감은 눈’이란 작품도 현실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야기한다.

 “우리가 눈을 떴을 때는 시력이 미치는 범위, 시야에만 국한돼서 볼 수 있잖아요. 시력이 억압하는 셈이죠. 반대로 눈을 감으면 내면의 세계에 눈을 뜰 수 있어요. 그 내면엔 여러 겹의 문이 있고, 들어갈수록 낯선 세상이 나오죠. 그게 시의 세계가 아닐까요.”

 그래서 이민하의 시는 현실세계의 대의명분이나 옳고 그름,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잘 읽히지 않는다. 그의 시는 그러니까 ‘감은 눈’으로 읽어야 한다.

 “시는 감식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취향이 필요한 것 같아요. 과거엔 시가 정신의 끼니, 양식이었다면 지금은 간식 역할도 수용해야 하는 것이 시대적 환경인 것같아요. 그것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고요. 독자들도 미식가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죠.”

글=김효은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민하=1967년 전북 전주 출생.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환상수족』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모조 숲』. 현대시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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