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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정치주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군사혁명으로 기왕의 헌정질서가 무너진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군정이 종언을 고하고 모처럼 민정으로 새출발을 하려는 마당에서는 무엇보다도 혁명의 뒤처리가 큰문제다. 』 -자유당때 이승만대통령의 입각권유, 해공과 유석의 민주당입당교섭, 정치활동재개후 야당중진들의 야당연합전선 참여 권후를 모두 물리치고 재야법조인으로 고희에 이른 정구영씨는 62년공화당 창당에 참여했다.
그의 공화당참여에는 창당주역이었던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북아현동 정씨의 집을 다섯번이나 찾았다는 「오현초려」의 일화가 있다. 김씨와의 접촉에서 그는 『민족적 민주주의 기치 아래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시하고 조국 근대화를 이룩하겠다는 공화당의 창당 이념에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는 것이다.
그는 정계에 투신하면서 합리 합법의 정치에 기여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가 뒤늣게 정치의 터로 잡은 공화당은 창당과정에서부터 벌써 김종필씨와 일부 최고위원들의 대립으로 김씨의 『자의반타의반 외유』 로 표현된 시련을 겪어야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숙명적인 「임시관리역」은 시작된다.
창당준비위원장인 김씨의 사퇴로 그가 창당대회에서 초대 당총재를 맡아야했고, 64년 6. 3사태로 김씨가 당 의장직을 떠나자 또 이를 맡아 김씨가 없는 공화당을 이끌었던 것이다.
창당과정에서 산고를 겪은 공화당은 박정희최고회의 의장의 당대통령 후보 수락으로 5.16혁명의 정통후계로 인지되었으나 얼마안있어 행정권과의 마찰과 원내일부 세력 반발로 안팎의 도전을 겪어야만했다.
이로써 비롯된 당체제개혁의 역사는 당권의 후퇴와 김종필 정구염씨등울 비롯한 창당주류들의 『당권으로부터의 소외』 의 역사였다.
65년12월 국회의장선거에서 김용태 예춘호 정태성의원등 주류계가 박정희총재의 지명을 어기고 정구영의원에게 몰표를 던진 항명파동이후 여당의 판세는 주류계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6.8선거에서의 개헌선을 훨씬 넘는 공화당의 압승은 공화당의 당내판도를 비주류중심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정구영씨를 마음의 의지로 삼은 구주류쪽에선 3선개헌추진에 저항을 느꼈다.
이추진과 저항의 진통속에 공화당은 숱한 진통을 겪었다. 68닌4월 「복지회사건」 으로 김용태의원이 당에서 제명된것을 필두로 김종필당의장의 갑작스런 정계은퇴, 양순직 예춘호 김달수 정태성 박종태의원의 제명을 가져온 4.15숙당 ,박대통령이 개헌 의사를 밝힌뒤까지도 조정되지않은 당론, 개헌잘의에 서명하고도 국회표결직전까지 지지를 보류했던 20명가까운 주류계의원들-정가의 밑바닥에 흐른 이모든일들이 정씨 주변에서 일어난 것이다.
호된 회오리 속에서도 공화당의원으로는 오직 정구영의원만이 개헌발의에도 국회표결에도 끝까지 반대했다. 정치와 법이 동떨어질 수 없다는 그의 정치철학으로는 이번개헌이 헌법정신에 어긋난다는 생각을 버릴수 없었다고한다.
정옹은 스스로 초대총재를 지냈고 당적부1번인 공화당에서 지금 이단자가 되었다. 군출신이 정치세력으로 형성된 60년대정치의 희생타처럼.
그러나 그는『어려운때를 당해 당을 뗘나는것이 선비의 취할태도가 아니기때문에 계속 당에 머무르겠다』고 한다. 『「석양에 홀로서서 갈곳몰라하여라」란 여말삼은 이색의 시조에서 자신을느낀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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