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태우에 충고한 ‘2인자론’…“절대 전두환 넘보지 마라” (84) 유료 전용
1980년 7월 2일 오후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간 지 46일 만에 청구동 집으로 돌아왔다. 보안사의 국방색 브리사 승용차 뒷자리에 타고 집 앞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소
-
“DJ 뭘 했다고 95만 표 차냐” 박정희, 그날 유신 작심했다 (50) 유료 전용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는 박정희 대통령이 634만여 표를 얻어 김대중 후보에게 95만 표 차이로 승리했다. 95만 표는 상식적으론 많은 차이지만 박 대통령의 기
-
JP “각하, 제가 나세르입니까” 처음으로 박정희에 대들었다 (47) 유료 전용
1968년 5월 있었던 이른바 ‘국민복지회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위세력인 6인방이 나를 무력화하기 위해 꾸민 음모였다. 김형욱을 앞세운 그들은 내가 차기 대통령 자리를 노리
-
“주한미군 3만 일본서 휴가” 이 말에 ‘워커힐’ 밀어붙인 JP (35) 유료 전용
내가 초대 중앙정보부장(1961년 5월 20일~63년 1월 7일)으로 공화당 창당 작업을 진행하던 시기에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이 불거졌다. 워커힐 호텔과 증권 파동, 새나라
-
“혁명 뒤처리 못하면 역적 돼” 67세 정구영, 37세 JP 손잡다 (34) 유료 전용
민주공화당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청람(靑嵐) 정구영(鄭求瑛·1896~1978·충북 옥천 출신) 선생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마지막 선비’였다. 지조를 절대 꺾지 않
-
“신당 타고 대통령 되셔야” JP 말에 미소 번진 박정희 (33) 유료 전용
혁명정부가 의욕적으로 일을 벌여 나가던 1961년 여름이었다. 내 머릿속엔 새로운 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의 혁명과업을 이어받을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드는 일이었다. 군인이
-
전라도 몰표 덕에 대통령 됐다…박정희 당선, 김대중의 한탄 ⑤ 유료 전용
“박정희씨가 집안 툇마루 밑을 곡괭이로 파도 금이 쏟아져 나올 그런 왕운(旺運)을 타고났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허술한 쿠데타가 성공할 수가 있었겠는가.” 훗날 5·16
-
3당 합당, DJP 연합 … 한국 정치 요동치게 한 게임 체인저
김종필(JP) 전 총리는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40여 년간 정계를 쥐락펴락했다. 때론 정적(政敵)으로, 때론 동반자로 애증이 교차했던 3김의 복잡미묘했던
-
JP “자유당 정권 왜 망했다고 보나” 예춘호 4시간 면접
“앞으로 군사정부가 큰일을 하는 데 관계해 달라.” 1962년 초 부산에서 대학강사로 일하던 예춘호는 박규상 동아대 교수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았다. 민주공화당 사전 조직에 동참하
-
독립된 정치개혁委 구성, 국회가 결정 사항 받아들이게 강제해야
8월 29일 오후 ‘한국사회대논쟁’ 좌담회에 참석한 학자들이 토론 중이다. 오른쪽부터 김민전 경희대 교수, 김형준 명지대 교수, 정용덕 한국사회과학협의회 회장, 정상호 서원대 교
-
“혁명은 숫자가 아니다 의지·민심으로 하는 것”
5·16은 한국사의 가장 드라마틱한 반전이다. 건국의 사명을 완수한 이승만 시대의 바통이 박정희 시대로 넘어가는 장면이다. 박정희의 5·16세력은 산업화와 자주국방을 내걸고 한국
-
[명문家를 찾아서]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덕수 이씨家
명문가란 통상 한 집안에서 정치인·관료·학자·기업인 등이 다수 배출된 경우를 말한다.천안·아산에서 명문가로 일컬을 만한 집안을 소개해 본다. 조한필 기자 유해를 옮겨오지 못한 가
-
가려운 곳 긁어주는 금융? 명동 가서 물어봐
을지로 명동 입구의 한국외환은행 본점. 과거 일제시대 때 이 자리에는 동양척식 주식회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1908년 일제가 자본금 1000만원으로 설립했던 이 회사는 식민지
-
[으랏차차 '88세 청년'] 12. 다시 정계로
청와대를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맨 오른쪽)과 악수하는 필자(맨 왼쪽). 박 대통령 옆은 당시 민주공화당 실세였던 김종필씨. 나는 5.16이 일어난 사실을 그날 오전 6시 라디오 뉴
-
[실록 박정희 시대]42.독특한 용전술…가사엔 엄격 정치엔 여유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자손을 위해 미전 (美田.좋은 땅) 을 사지 않는다' 는 일본 한시 (漢詩) 를 자주 암송하곤 했다. 일본 메이지 (明治) 유신을 주도한 사이고 다카모
-
[실록 박정희시대]27.한·일 국교정상화
한.일회담은 밀실회담이었기에 권력 변화에 민감했다. 일본은 박정희 (朴正熙) 라는 새 권력자를 협상의 최고 파트너로 판단, 군정 (軍政) 기간중 회담을 타결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
-
목숨건 민주투쟁.단골2위 영욕 점철 - 大選 4수생 김대중의 45년 정치역정
김대중(金大中)국민회의총재는 전당대회 강행군 후 숨돌릴 틈도 없이 20일 아침부터 바쁜 일정을 가졌다. 오전6시에 일어나 김영삼(金泳三)대통령.김종필(金鍾泌)자민련총재와 축하전화
-
1.권력의 모태-초기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舊중앙정보부)가 34년에 걸친 남산.이문동시대를 마감하고 강남 대모산.구룡산자락(내곡동)으로 둥지를 옮겼다.61년 5.16혁명 직후 창설된 정보부는 4개 공화국을 거
-
1.권력의 모태-초기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가 34년간 공작정치.정보정치의 대명사였던 「남산」시대의 막을 내렸다. 안기부는 9월들어 3주동안 모든 부서의 이사를 끝냈다.10월1일부터는 서울서초구내곡동의 구룡산과
-
후계 약속 때마다 약해진 JP|"유신 때도 소아에 집착" 혹평도|17면에서 계속
김 부장은 청구동 수사도 차 실장이 부추겼다고 JP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한다. 김씨의 증언. 『내가 풀러나고 엿새후인 크리스마스 이브에 김 부장이 코냑 한 병을 들고 청구동엘
-
(10)JP와 군부|개혁주도세력 JP행적에 불만|63년 군정과정서 한때 거사세도
80년 서울의 봄이 안개정국에 맴돌다 만 것은 집권세력이 구심점을 만들어내지 못한데도 원인이 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권한은 넘겨받았지만 권력기반이 없었다. 바람직한 일은
-
(6) "4대 의혹 눈치채고 번민"
5·16주체들의 내부투쟁은 사전조직을 둘러싸고 불이 붙었다. 62년이 저물던 l2월23일 워커힐에서였다. 김종필은 이영근을 데리고 나가 최고위원들 앞에서 사전조직을 브리핑했다. 극
-
(4016)|제80화 한일회담(215)-김부장 첫 번째 「외유」
김-「오오히라」회담으로 한일관계는 넘어야 할 준령 하나를 넘어섰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준령을 넘고보니 발밑은 짙은 안개였다. 안개 저편에
-
(3729) 제79화 육사졸업생들-5월 동지회
재건국민운동은 박정희의장의 지시에 따라 62년 가을 민간운동으로 전환했다. 이 운동의 산파역이었고 최고회의에서 국민운동을 담당했던 강상욱대령은 이때 전국을 돌며 1백60여회나 고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