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6)|제80화 한일회담(215)-김부장 첫 번째 「외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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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오오히라」회담으로 한일관계는 넘어야 할 준령 하나를 넘어섰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준령을 넘고보니 발밑은 짙은 안개였다. 안개 저편에는 「평화선」이라는 또다른 준령이 가로놓여있었다.
발 아래의 자욱한 안개. 그것은 김종필씨가「오오히라」외상에게 『귀국하면 국민들의 지탄이 나를 기다릴것』이라고 한 바로 그 상황이었다.
김-「오오히라」회담이 있은지 1년이 좀 지난 64년3월 김-「오오히라」메모는 그 전모가 공개된다. 그것은 엉뚱하게도 『김-「오오히라」 메모의 진상을 밝히라』는 한일회담 반대 데모의 거센 물결이 청와대까지 밀려드는 비정상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데모대의 압력에 의해 국가간비밀교섭 내용을 일방적으로 공표하기란 결코 쉽지않은 노릇이다.
비밀로 묻어두는게 상식이자 당연한 외교관례인 김-「오오히라」메모의 내용을 새삼 『진상이 이렇다』고 세상에 공표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당시의 상황을 좀 알아보자.
결론부터 말해 김-「오오히라」회담이 있은 62년11윌부터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65년6월의 2년6개윌여동안 한국은 한일문제와 관련, 국내적 시련의 길을 걸었다.
구정치인에 대한 정치활동 허용, 공화당 창당,혁명주체들의 민정참여,제3공화국 출범에 이르는 이 기간동안 박정희의장과 김종필씨는 정치인으로서,집권자로서 도전과 시련을 겪는다.
안으로는 민정참여를 둘러싼 혁명동지들의 알력과 그로인한 상호간의 압력과 견제에 견뎌야했고,밖으로는 구정치인들의 끈질긴 정권도전과 군인의 정치참여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63년1월1일 구정치인에 대한정치활동 재개허용과 때를 갈이해 박의장과 김부장을 포함한 이른바 5·16 주체세력들은 군복을 벗고 민정에 참여할 준비롤 서두르기 시작했다.
김부장은 이미 민정이양에 대비해 정국을 주도해나갈 정당 결성준비를 미리 해두고 있었다.
한일회담의 막후 실력자로서 미국과 일본을 드나든 것은 김부장한테는 오히려 잠시 머리를 식히는 망중한에 불과했다.
그의 그런 민주공화당사전조직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은 사전조직에 소외됐다고 느낀 최고회의 내의 군선배들이었다. 그들은『김종필이가 선배들을 제쳐놓은채 독주하고 있다』 고 비판하고 나섰다. 이주일 · 김동하· 김재춘씨등이 대표적인 반김세력이였다. 그들은 박의장에게 그의 독주를 중단시키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들은 김부장이 중앙정보부원들을 시켜 공화당을 사전조직했으며, 그 과정에서 최고위원들을 소외시키고 대신 구정권 하의 사람들을 발기인으로 참여시켜 혁명동지와 선배들을 내몰려고 하고있다고 주장했다. 반김세력들은 궁극적으로 그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런 압력에 부대껴 공화당 창당준비위원장이었던 김씨는 마침내 63년 2월20일 『모든 공직을 떠나 초야의 몸이 되겠다』 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닷새후인 5일 김부장은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 이라는 말을 남기고 첫번째 「외유」 에 오른다.
당시로서는 한일회담과는 무관한 퇴진이었지만 그러나 김씨의 명암이 엇갈리는 정치 행적은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룩되기 까지의 2년6개월여동안 그대로 한일회담의 명암으로 투영되게 된다.
그만큼 한일회담과 JP는 깊이 연루되어 있었고 때문에 박의장과 JP가 국내 정치 상황에 의해 비틀거릴 때는 한일관계도 따라서 비틀거리게 되곤 했다. <계속><김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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