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직후 전방서 3년 보냈다, 등단작 ‘새하곡’ 낳은 작가수업

  • 카드 발행 일시2024.06.17

12. 지난했던 등단 과정 

나는 남들에 비해 등단이 꽤나 늦었다. 빠른 경우 나보다 일곱 살 위인 김승옥 선배나 한 살 많은 오정희씨가 20대 초반, 김원우 같은 또래 작가가 늦어도 20대 후반에는 등단했는데, 나는 만 나이로 치면 서른한 살인 1979년에 문단에 나올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손해가 난 건 아니었다. 문단에 늦게 나오다 보니 그만큼 소위 재고(在庫)가 많았다. 완전한 원고 형태는 아니었지만 언젠가 써먹을 생각으로 가지고 있던 것들이다. 1979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중편 ‘새하곡’)에 이어 6월 『사람의 아들』이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에 오르자 각종 문학잡지들의 단편 원고 청탁이 쏟아졌는데 나는 재고 덕분에 그 많은 청탁을 어지간히 받아줄 수 있었다. 웬만한 작가들은 재고가 부족해 그렇게 하지 못한다. 나는 그러지 않았으니 남들이 보기에는 단기간에 엄청나게 작품을 쏟아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등단해서 인정받자 작품 보는 안목 열려 

묘한 건 등단해서 작가로 인정받게 되면서 작품에 대한 내 안목도 그만큼 열리더라는 점이다. 재고들 가운데는 신인 공모나 문예지 추천에 도전했다 떨어진 작품이 몇 편 있었다. 어딘가 부족한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등단한 다음 원고 청탁을 받고 나니 그 ‘재고’들을 비교적 손쉽게 고칠 수 있었고, 목표하는 수준에 어렵지 않게 도달시킬 수 있겠다 싶었다. 그 어렵다는 신춘문예를 통과했다는 데서 오는 어떤 정신적인 고무, 비록 한두 번의 성공이었지만 그 전에는 실패를 거듭하다가 이번에는 어떻게 등단할 수 있었는가를 따져 보는 과정에서 생겨난 눈썰미, 그런 것들 덕분이었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사실 나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새하곡’을 투고한 뒤 그간의 낙선작들과 재고들을 한데 모아 ‘낙선작품집’을 자비출판할 생각이었다. 그때도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 열두 편이었는데, 그 가운데 중편 ‘사람의 아들’, ‘그 겨울(훗날 ‘그해 겨울’)’과 ‘알타미라(훗날 ‘들소’)’, 단편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 ‘맹춘중하(孟春仲夏)’와 ‘심근(心筋), 그리하여 막히다’를 등단 후에 고쳐 써서 발표했다. 끝내 재활용하지 못한 재고도 있었는데, 일종의 실험작들로, 애초에 잘 되지 않는 실험을 시도했던 것들이었다.

이문열씨는 뒤늦게 군에 입대해 전방부대 통신병으로 근무했다. 자투리 시간에 당시를 외우거나 인문서를 읽었다. 사진 이재유

이문열씨는 뒤늦게 군에 입대해 전방부대 통신병으로 근무했다. 자투리 시간에 당시를 외우거나 인문서를 읽었다. 사진 이재유

나는 한번 응모했다 떨어진 작품은 웬만하면 내버려 두고 새 작품을 썼다. 당시 작가 지망생 가운데 낙선작에 미련이 남아 몇 번이고 고쳐 쓰는 경우가 더러 있었는데 그래서는 작가가 되더라도 희망이 없다고 봤다. 69년 문학을 마음속의 도달점으로 정한 뒤로는, 자주 그 길을 부정하고 비틀거렸을지언정 작가 아니면 할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낙선작이 아깝다기보다는 어차피 내 자산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경험의 축적이든 감정의 체험이든 내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은 결국 오랜 축적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처음부터 새 작품을 써서 응모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중편소설 부문 신설 공고를 확인하고 몇 년 만에 낡은 원고 더미를 뒤져봤으나 모두 마땅치 않았다. ‘알타미라’를 고쳐서 보낼까 싶었지만, 너무 추상적인 데다 구닥다리 같아 보였다. 어느새 원고 마감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렇다면 새로 써보자는 격렬한 충동이 갑작스럽게 일었다. 제대 후에는 결코 입에 담지 않으리라고 맹세했던 군대 얘기를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 후 3년밖에 지나지 않아 기억이 생생했고, 마음에 맺힌 것이 많았던지 소재는 중편에 다 담지 못할 정도였다. 한 20일 밤낮 없이 꼬박 중편 쓰기에 몰두했다. 글이 그렇게 술술 풀린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